조선시대 사람들은 방 안 구들장 위에 않아서 엉덩이를 지지며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다. 천장에는 고드름이 얼더라도 일단 아랫목에 않으면 따뜻한 온돌의 열기가 몸을 녹여줬다. 이렇듯 조선시대 방안의 살림도구는 않아서 생활하도록 맞춰져 있다.
 반면 고구려 사람들은 서서 생활했다. 흔히 온돌은 고구려에서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고구려 사람들도 앉아서 생활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반대이다.
 고구려인들은 조선인들에 비해 활달한 기상을 가지고 있었고 전란과 정복사업이 잦았던 만큼 방 안에 오래 눌러앉아 있기보다는 언제든 말을 타고 달려나갈 수 있는 입식생활을 선호했다.
 ‘삼국지’를 살펴보면 고구려 사람들이 모두 달음박질을 치듯 다닌다고 했다. 그들은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었고 신발을 벗을 경우에도 언제든 신고 나갈 수 있도록 바로 자신의 앞에 놓았다.
 하지만 입식생활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고구려 온돌문화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의 온돌은 오늘날처럼 방 전체를 데우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을 데우는 쪽구들이었다. 따라서 방 내부에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쪽구들이 놓인 장소와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하는 방바닥 공간이 함께 있었다.
 집안시에서 발굴된 귀족의 집터 혹은 신전 유적으로 여겨지는 동대자 유적에는 ‘ㄱ’자 모양으로 쪽구들이 놓여 있는 방이 있다. 방 바깥으로 굴뚝이 나 있지만 불을 지피는 곳은 방 바깥쪽 부엌이 아니라 실내에 있다.
 고구려의 군사실인 아차산 제4보루성 유적에서도 12개의 쪽구들 유구가 확인된다. 이 유적도 부분 난방이다.
 군인들은 항시 경계에 임해야 하는 만큼 온돌방에서 넋을 놓고 푹 쉴 수는 없다. 즉각 신을 신고 출동하려면 잘 수 있는 공간에만 난방이 되고 나머지 부분은 실내지만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마치 오늘날 군대 내무반의 침상구조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쪽구들은 고구려에서 발전한 난방법이다. 쪽구들은 이후 만주, 내몽고와 몽고, 신강성과 중앙아시아 지격까지 광범위하게 전파됐다. 또 후대에는 온돌로 발전했다. ‘신당서’를 보면 신라에서는 겨울이면 부엌을 실내에 만든다고 되어 있어 신라에까지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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