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이유 궁전은 궁전 전체에 닿는 직선의 중심에 왕의 집무실을 두었다. 때문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궁의 모두를 한 눈에 볼 수 있던 곳은 바로 왕의 방이었다. 이처럼 시선은 단순한 바라보기의 행위를 넘어 권력에까지 닿는 하나의 특권이다. 현대에 있어 이러한 시선의 특권은 펜트하우스나 스카이라운지 같은 고층건물 최고층의 경제적 가치로 환산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인왕산에서 경복궁 근정전을 거쳐, 서울 시내로 이어지는 시선을 끊는 위치에 세워졌다. 이유인즉슨 ‘조선의 기를 끊기 위해’서였다. 풍수 지리학을 단순한 미신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이를 시선과 동선, 감성적 경험이 종합된 일종의 경험적 통계학으로 이해할 때, 그들의 이러한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측면까지 고려한 식민지배는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력 이전까지를 지배하고자했던 그들의 무례함과 잔인함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것 같아 씁쓸하다.
 시선이란 이처럼 하나의 특권이자 생물학적 감각 본연에서 우리의 판단력 제반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행동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제주대학교 정문 앞에 지어지고 있는 2층 건물은 본관에서 정문에 이르는 모든 시선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다. 대체 학생들의 어떤 복지를 위해, 또는 어떤 용도로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위치의 절묘함에서 모든 시선을 자신의 용도로 흡수하고자하는 건물주의 고의성이 느껴진다면, 시각예술을 전공하는 필자의 지나친 예민함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어떤 과정을 거쳐 그처럼 모호한 성격의 건물이 그런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나마 작은 바람이 있다면 그 흔한 커피숍이나 스넥바 따위는 아니길 빈다.
 우리 제주대학교 학생들의 홀홀한 귀가 길의 뇌리에 값싸게 반짝이는 간판문구가 4년간 박혀야 함을 생각한다면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제주도는 섬 전체가 명당이다. 한라산에서 바다로 뻗는 기슭 어디에서나 ‘기’가 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때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가 바다가 아닌 내륙을 달리는 버스에서도 바다가 보이는 것에 경탄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새삼스럽게 우리가 누리는 시선의 자유로움을 자각했었다. 낮은 곳에서는 낮은 대로 높은 곳에서는 높은 대로 솟아오르는 수평선의 존재감은 아마도 이상향이자 두려움의 존재였던 ‘이어도’의 바탕이었을 것이고 흔히 이야기 되는 거친 ‘섬기질’의 바탕이 아니었을까 싶다.
 환경보존은 먼 데서만, 관광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또는 누려야할 권리에 대한 올바를 이해가 있다면 우리생활 주변에서 무지하게 공격되는 권리에 대해 성낼 수 있게 된다. 이에 우리 제주대학교의 ‘시선의 권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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