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김기덕 감독이 제61회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많은 한국영화가 해외에서 조금씩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영화제 수상과 더불어 한 발자국 더 나가서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나라 감독이 만든 영화가 미국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한다면 어떨까? 지나친 상상이라고? 믿겨지지 않겠지만 지나친 그 상상은 이미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다. 미국 박스 오피스 1위의 영화를 만든 잊혀진 흥행감독 정창화(75).
 그는 감독이라는 명칭보다 한국영화의 거목이던 최인규 감독의 제자이자 현재 한국영화의 거장인 임권택 감독의 스승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모지였던 한국영화계에 액션장르를 개척하고 성숙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데뷔작인 <최후의 유혹> 이후로 만든 51편의 영화 중에서 30편이 액션영화일 만큼 그가 액션에서 보여준 재능은 탁월했다. 하지만 당시 멜로물, 청춘물만을 선호하고 다른 장르에 경직돼 있던 우리 평단은 그를 외면했고, 그는 홍콩으로 진출한다. 홍콩에서 러브콜을 보내 온 것이다.
 홍콩 최대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의 란란쇼 사장과 그는 손을 잡고 흥행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는 상영되는 족족 충격과 감탄을 자아냈고, 그 과정에서 1973년 3월 21일 미국 흥행 1위를 기록한 영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탄생했다. 이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덜컥 1위를 차지하더니 다음 주에는 3위, 또 그 다음주에는 2위로, 또 1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이 영화는 미국에서 상영된 모든 외국 영화의 흥행기록을 갈아 치우면서 그 해 영화 순위 30위를 차지했다. 대단한 성적이다.
 홍콩에서도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며 입지를 굳어가던 그는 1977년 <파계>라는 영화를 끝으로 홍콩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2년 뒤 화풍영화사를 설립한 그는 10년이 넘도록 제작자로 활동하다 은퇴했고,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그를 회고하는 ‘정창화감독 회고전’이 개최된 바 있다.
 또한 지난 6월 파리에서 열린 ‘세계영화의 만남’행사에서 그는 ‘한국 액션영화의 전설적인 인물로서 70년대 무협영화 대중화의 주인공’이란 AFP통신의 극찬을 받으며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가족들과 오붓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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