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 독서와 삶 사이에는 일종의 유비관계가 성립한다. 한 개인의 삶이란 세상이라는 책을 읽어가면서 나름대로 적어 놓는 자신만의 메모가 아닐까?

  의미 있는 삶이란 그래서 의미 있는 독서가 그러하듯이, 단지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데 그치지 말고, 항상 남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것들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읽고, 어떻게 살아가야 우리의 삶과 독서에 의미가 깃들 것인가?

  나는 그 답을 창조적 독해와 창조적 삶의 길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 때의 일이다.

  나에게 한문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께서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크릴 (H. G. Creel)이 쓴 공자에 대한 책을 읽어 보았는데, 놀랍다. 틀림없이 내가 그 사람보다는 『논어』를 한 번이라도 더 많이 읽었을 텐데, 나는 왜 그런 책을 쓰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하셨다.

  사실 한문 독해력에 있어서나, 논어를 읽은 횟수에 있어서나 크릴을 앞지르는 수많은 한문 도사들이 틀림없이 있을 터인데, 크릴만이 공자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크릴의 논어 독해가 바로 창조적 독해였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예컨대 아무리 논어를 백번 천 번 읽었어도 그것을 하나로 정연하게 제시하지 못하면 그 가치가 크게 손상됨을 말한다 하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창조적 독해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항상 가설을 세워가며 글을 읽는 것에서 가능하다. 즉,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논어』를 예로 들면, 공자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을까, 공자는 사후세계를 믿은 것이 아닐까 등등의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논어를 읽어야 한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에 비추어 논어의 구절들에 대한 취사선택이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다양한 논어의 내용들이 하나의 체계 속에 일관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창조적 독해가 선입견을 가진 읽기라면 창조적 삶은 목표가 있는 삶이다.

  소설 삼국지에 보면 유비는 오랫동안 불우하게 이리저리 방랑하였음에도 손권이 제공한 안락한 삶을 버리고 떠나고 있다. 또 공명은 한 나라의 승상으로서 얼마든지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음에도, 국력으로 보나, 시기로 보나 무모하게 생각되는 위(魏)나라에로의 정벌을 여러 차례에 걸쳐 단행한다. 그들이 이렇게 쉽지 않은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한(漢)왕조의 복구 혹은 천하통일이라는 뚜렷한 삶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목표를 가지고, 흔들림 없이 그 것을 성취하려 노력했기에 유비와 공명은 그저 소비하는 안주의 삶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들이 비범했다면, 바로 이 점에서 그러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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