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견 지극히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일 것이라 여겨지는 지명(地名)이 실은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소산이며 제국주의 시각의 산물일 수 있다는 점은 일찍이 Edward W. Said가 ‘동양’(Orient)이라는 지명 속에 숨겨진 서구 중심의 편향된 이데올로기를 예리하게 간파해 보여줌으로써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런데 이러한 ‘동양’ 류의 ‘지명의 정치’(politics of place name)는 ‘아시아’(Asia)라는 용어에도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아시아란 무엇이었던가? 근대 이전 유럽인들에게 아시아란 문명권인 유럽 이외의 변방 지역, 곧 야만인들이 사는 비문명 지역에 불과하였다. 그 곳은 협력과 공존의 대상이라기 보다 정복과 계몽의 대상이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Asiatic Mode of Production),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 등은 이른바 서구 지식인들이 동양 혹은 아시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를 웅변하고 있으며, 그들은 ‘동양 사회에서는 오직 군주 한사람만이 자유롭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는 자신만의 거울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개별적인 특정 지명만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지역구분 방식에도 실체적 진실과는 무관하게 힘의 역학관계가 작용한다. 우리가 전통적으로(거의 무의식적으로) 지구상의 가장 큰 땅덩이를 유라시아라 부르기보다 유럽과 아시아로 나눠 부르는 것이 좋은 사례가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각 단위 지역내 중심과 주변의 존재를 전제로 한 구분이다. 고대에는 로마와 장안, 중세에는 비잔티움과 항주, 혹은 북경, 그리고 근대로 오면 런던·파리·베를린과 동경·북경을 각 대륙의 중심지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역구분 방식하에서는 역사상 세계 최대의 강역을 가졌던 몽골 제국이 관심의 대상에서 아예 사라져버린다는 점이다.

  13~14세기 약 200년 동안 동으로는 한반도를 포함한 태평안 연안까지, 서로는 폴란드와 터키 국경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지상 최대의 광역을 호령하며 동서 문물의 교류를 촉진하고 진정한 ‘세계사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긴 팍스 몽골리카의 역사가 이토록 쉽게 무시되어도 무방한 것일까?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는 바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해온, 그럼으로써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온존시키는데 기여해 온, 유럽과 아시아라는 이분법적 담론을 해체하고 우리의 관심대상에서 멀어졌던 몽골 제국 중심의 유라시아 대륙을 새롭게 건져 올려 보여주고 있다. 중국사, 중앙 아시아사, 러시아사, 유럽사를 전공하는 4명의 역사학자가, 이름만 다를뿐 궁극적으로는 서구적 가치로의 합일을 주창하고 있는 ‘문명충돌론’과 ‘문명공존론’을 극복하고 ‘상생’의 세계관을 제시하기 위해 현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써내려간 이 책은 우리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모처럼 얻게 된 우리의 거울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 아니 유라시아의 참모습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이들은 이 거울을 이용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박한제·김호동·한정숙·최갑수, 2002,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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