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입학 전형 방식을 놓고 사회가 들썩인다. 한 쪽에선 변별력을 높인다며 논술형 본고사를 치르겠다고 하자, 다른 한 쪽에선 이름만 바꾼 본고사다, 공교육이 무너진다, 사교육비가 급증한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된다고 항변이다.지난 7일에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교육부의 2008학년도 대입시안에 대해 이른바 ‘내신등급제 반대’ 촛불시위를 벌였다. 서울 광화문에 4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우리들은 시험 보는 기계가 아니다, 학교는 친구들과 함께 도와가며 공부하고 자라나는 곳이다, 내신 때문에 내 짝궁을 적으로 만들게 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생들의 항변은 아름답고 순수하게 들린다. 학교는 일생의 벗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과 독서를 통해 감수성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인생의 소중한 청춘이 잠시 머무는 곳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항변들 뒤에는 학벌사회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가 자리하고 있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어떤 대학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는 나라, 대학입시에 실패하면 실패한 인생으로 간주되는 나라,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는 어느 대학 출신이냐가 우선 궁금한 나라, 한 마디로 학벌이 곧 능력이요 권력이요 부(富)인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렇다 보니 대학입시는 학생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이 땅의 모든 국민은 교육전문가가 된다.

  똑똑한 사람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한 결과는 보상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그 똑똑함을 누가, 언제, 어떻게 판정하느냐이다. 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s)이론을 주창한 미국 교육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H. Gardner)는 교사가 IQ라는 단일 실재로 학생들을 똑똑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로 구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1시간 정도의 탈맥락적인 상황에서 지필검사를 하는 IQ 검사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IQ에 기반한 전통적인 학교교육을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즉, IQ는 인간의 언어적 지능과 논리-수학적 지능을 측정하는 것인데, IQ에 기초한 학교교육은 국영수를 중시하게 되며, 결국 IQ가 높은 학생은 국영수를 잘해 똑똑한 학생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드너는 학교 우등생이 반드시 사회 우등생일 수 없다고 하면서 인간능력관을 확장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그는 언어적 지능과 논리-수학적 지능 외에, 음악적 지능, 신체-운동적 지능, 공간적 지능, 대인관계 지능, 자기이해 지능, 자연주의 지능, 실존주의 지능 등과 같은 다양한 인간의 지적 능력을 거론한다.

  최근 대학입시 전형을 다양화하고 특성화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능은 대입에 결정적이다. 교육학자인 나는 수능을 ‘19세의 비극’으로 표현한다. 수능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단 하루 만에 국가가 전국의 모든 수험생들의 운명을 갈라놓는 비극인 것이다. 손쉽게 평가하고자 하는 어른들의 오만함이 엿보인다. 이러한 오만함이 학생들을 점수라는 숫자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육은 점수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기에는 너무도 제한적인 지필고사 점수로만 학생들의 능력을 재는 것은 교육적으로 볼 때 도덕적이지 못하다. 더욱이, 점수로 대학이 서열화 되고, 이것이 사회경제적 지위로 고착되는 것은 점증하는 인간 수명의 의미를 무색케 한다. 1등은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10등은 영원한 10등이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는 나라에서 국가경쟁력은 방황한다. 소위 ‘학벌세탁’을 위해 서울로 향하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지방대학 교수들은 허탈할 뿐이다. 서울 강남 모여고 게시판에 적힌 “한 문제만 더 맞자, 남편감이 달라진다”는 표현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학벌해체와 대학서열이 타파되지 않는 한, 대입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학생들의 항변은 계속될 것이다. ‘학벌 없는 사회’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들을 즐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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