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6월, 나날이 높아만 가는 하늘이며, 절정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는 녹음 짙은 교정의 풍경들이 시간의 한 매듭을 지으라고 이야기를 건넨다. 학기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문턱까지 들려오면서 어느 때는 기대에 젖은 듯, 혹 어디에선가는 불안하듯 후회하듯 여름과 겨울이 뒤섞인 떨리는 소리를 타고 여기저기서 부산하게 한 학기를 정리하려는 술렁거림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 소리가 환청이 아니라면, 한 학기 내내 스스로 시간을 창조하며 치열하게 학기를 보낸 이들보다도 그 어느 시대 밤마다 매질당해 지하감옥으로 내던졌던 노예들처럼 시간에 의해 이끌린 채 수동적으로 허송세월한 이들이 혹여 더 많은 탓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간을 이끌어 가는 창조자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진정한 의미의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대학은 곧 산업이라는 위험천만한 용어로 현대적 의미의 대학의 역할과 기능을 정의하고는 대학의 실용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불안한 환청은 대학에 대한 이러한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대학이 존재하기 위한 진정한 본질은 치밀한 사고와 분방한 상상력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사물을 체계적 종합적으로 인식하려는 지적 노력의 선행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물론 대학의 실용성 또한 이 시대의 주요 흐름을 선도하기 위해 필요한 기능이라는 것임을 경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학에 대해 교육정책과 산업이 실용적 기능을 강조하다 못해 강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은 대학 존재의 본질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음을 또한 생각해야 한다.

  실용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 혹은 편견의 망령이 온 캠퍼스 구석구석을 핥고 지나간 자리에는 온통 실용의 껍데기를 둘러쓴 과목과 분야만이 남아 의기양양하게 혀를 낼름거리고 있을 뿐이다. 실용에 지나치게 무게를 둔 탓에 학생들은 이제 사물의 근원에 대해 사고하고 상상의 날개를 펼쳐 미로를 탐구하지 않아도 될듯하다. 이제는 시간의 도구인 실용에 이끌려가며, 인간존재의 근원인 상상적 창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될듯하다. 그러나 지금 한학기의 출구에서 서성거리며 떨리는 소리로 불안하게 그들이 외치고 있는 것은 근원의 탐구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다. 시간에 의해 그저 이끌려 왔던 그들의 존재이유에 대한 뼈아픈 각성의 소리일 것이라는 행복한 상상도 해본다.

  대학은 물론이고 현실 생활전반에서 실용성이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치열하게 훈련된 치밀한 사고와 상상력의 단단한 토대위에 서있어야만 한다. 대학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고에 눈을 돌려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철학적 사고에의 토대가 되는 사물을 근원에서 파악하고 해석하기 위한 직관의 능력 혹은 상상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과정 혹은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학생들 또한 때때로 실용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사물을 바로보고 사물의 근원을 탐색하기 위한 직관이나 상상력은 단지 선천적인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만은 아니기에 후천적인 노력 또한 필요한 것이며, 학생들이 대학에서 전심을 다해 기울여야 할 노력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따라서 한 학기를 마무리하려는 이제 때로는 탐식하듯 독서에 빠져보기도 해야 하고 때로는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사람냄새를 띤 슬프고도 고요한 자연의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고즈넉한 숲길에서 깊디 깊은 명상의 시간 또한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또 다른 한 학기의 출구에서 한숨 띤 목소리로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지금은 지나간 시간의 의미에 대해 길게 되새김질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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