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산업혁명기의 동시대 영국인들에게 물질적, 상업적, 삶으로부터 벗어나서, ‘소박한 삶’과 ‘높은 사유’를 영위하도록 촉구했다.

  2백년이 지난 지금, 워즈워스의 소박한 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에 너무 쉽게 사로잡혀 소박함의 미덕은 잃은 채 최신 제품으로 자신을 장식하고, 그것이 자신의 지위와 부를 나타내는 양 과시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우리의 외양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 내면은 피폐하게 만든다. 정신이 가난한 현대인은 더욱 더 물질적 삶에 빠져 자신의 마음을 궁핍하게 만들 뿐이다. 궁핍한 마음을 풍성하게 하려면 워즈워스가 말한 소박한 삶을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면 소박한 삶이란 무엇인가?

  리영희 선생의 삶은 소박한 삶의 전형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리영희 선생은 잘 알다시피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이다. 그는 평생 소박한 삶을 영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동차도 타지 않고 대신 대중교통수단을 주로 이용하고 복권·경마 같은 사행성 투기도 하지 않았으며, 권력자들과의 친교도 애써 맺고자 하지 않았다. 이러한 소박한 삶은 선생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은 누리게 하지 않았지만, 대신 높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여,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귀중한 많은 좌표를 제공하였다.

  자본주의 문화로 이루어진 미국의 경우에도, 소박한 삶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헨리 데이빗 도로우이다. 그는 자본주의 가치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시골인 월든으로 들어가 오두막 집을 짓고 불필요한 문명의 이기는 버리고 삶을 단순화시켜 살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욕망의 단순화와 양심의 법칙에 따른 삶을 살고자 했다. 그의 소박한 삶은 지금 미국 사회에서도 자본주의적인 삶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다.

  컴퓨터와 같은 현대문명의 대명사인 빌 게이츠의 생활의 한 단편은 소박한 삶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빌 게이츠도 그가 어떤 구상을 하거나 새로운 생각을 얻으려면 도시를 떠나 컴퓨터도 없고 다른 문명의 이기가 거의 없는 시골의 집으로 은둔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현대 문명의 이기로부터 자유롭고 삶이 좀더 소박하고 단순할 때 높은 사유를 할 수 있고 여기서 새로운 구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소박한 삶이란 불필요한 문명의 이기는 떨쳐버리고 필요한 물건들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해서 삶을 좀더 단순화시켜 산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문명의 이기에 종속되면 우리의 의식도 물화되어 좀더 높은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우리의 인간다운 삶도 방해받게 된다.

  즉, 사회구성원이 물질적 부로 서로와 경쟁하면 구성원간의 질시와 갈등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고 사회의 긴장도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좀더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소박한 삶을 영위하면 물질로 경쟁하지 않게 되고 서로를 배려하고 먼 미래까지 바라는 보는 안목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사회도 한층 성숙한 단계에 이를 것이다.

  우리 제주대 캠퍼스에도 이런 소박한 삶을 실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강의만 시작되면 휴대전화의 진동소리가 여지없이 들린다. 학생은 그 소리가 미미하다고 생각하지만, ‘기계 새’의 소리는 수업의 조용함, 학생들의 집중력, 선생의 강의를 끊어놓을 정도로 크게 들린다. 그러면 그 학생은 재빨리 전송되어온 내용을 확인하기 바쁘다. 더 심한 경우에는 수업 중 휴대전화와 ‘사랑’에 빠진 학생들도 있다. 이들은 온통 휴대전화에만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학생들에게 수업 중에 올 위급한 전화가 얼마나 될까.

  이제부터라도 수업 중에는 휴대전화를 꺼는 것으로부터 우리 삶을 단순화시켜 사는 소박한 삶의 향기를 누려보면 어떨까. 그러면 그 향기는 멀리까지 미칠 것이다.

  우리대학 캠퍼스도 한층 성숙한 캠퍼스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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