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바람의 손길이 내 머리칼을 흩트려 놓는 이른 저녁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바람이 쌀쌀했지만, 특이한 발상으로 주목받는 그가 보고 싶어졌다.
『시계 소릴 멈추고 커튼을 내려요. 화병 속엔 밤을 넣고 새장엔 봄날을 온갖 것 모두다 방안에 가득히 그리고 둘이서 이렇게 둘이서 부드러운 당신 손이 어깨에 따뜻할 때 옛 얘기처럼 쌓여진 뽀얀 먼지 위로 은은히 퍼지는 기타소리 들리면 귓가엔 가느다란 당신 숨소리』
문득 이 노래 구절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 때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며 수줍게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 그 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본다.
김기덕 감독은 제주도에 처음 와봤단다. (수취인 불명)이란 영화가 끝나고 그 영화 속의 잔인함이 머릿속에 남겨져 있는 상태로 만나서인지 우락부락 하고 좀 무서운 인상을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첫 인상은 예상 밖이었다. 처음 온 제주도에서 그의 영화에 호기심 어린 눈을 던지는 관객과의 접촉이 마냥 쑥스럽고 부끄럽다는 얼굴이었다.
김기덕 감독은 서른 세 살까지 영화를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중학교 진학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오랜 공돌이 생활이 전부였다. 그는 문화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이다. 너무 오랜 시간 일을 하고 나서 지난 시간을 떠올려보니 막연한 생각만이 가득했는데, ‘가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데, 어디 내 맘대로 살아보자'하는 생각으로 결국 그는 프랑스로 떠났다. 프랑스에서 그의 생활은 생각이 가는 대로 사색을 했으며 많은 시간 일을 했던 만큼 많이 쉬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영화를 처음 접했고 그러한 경험은 김 감독에게 충격적이었다고 말한다. 그 경험이 모티브가 돼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많은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모두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의식이 쓴 시나리오를 재해석할 자신이 없다는 게 이유이다. 그는 “나는 도입과 앤딩의 5분에서 10분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그 사이를 메우는 것은 처음과 끝의 중요성에 맞게 에피소드로 메워야 했다"고 말했다. ‘특이한 시나리오는 어떻게 나온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발상 안에 있는 이미지에서 나온다고. 그는 역설로 사건을 만들어내고, 직설적으로 그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영화를 창조한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은 기술과 방법이 없다며 지금까지 만든 8개의 영화는 그 시절에 주어진 환각이 만들어 낸 것 같단다.
지금까지 그의 사진들을 보면 모두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 관객은 그가 왜 모자만을 쓰나 하고 궁금해졌는지 '왜 모자 쓰세요?'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놓는다. 순간 그는 모자를 벗어 머리카락을 땡겨보며 “저 머리 있어요"하고 말한다. 역시 재치가 있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짧은 머리는 자신이 직접 깎는 머리라고 했다. 5년째 미용실에 가지 않고 눈을 감고 느낌으로 머리를 깎는다고 한다. 그는 옷도 직접 만들어 입는다며 그 때 입은 옷도 자신이 직접 만든 옷이라고 자랑을 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을 직접 만들고 싶은 느낌, 나름대로 자꾸만 뭔가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강한 그이다. 심지어 소설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남이 주는 문학적 의미에 흡수돼 버리는 것 같아서 두렵다는 입장이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인생의 철학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특이한 감독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김기덕 감독 자신은 스스로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주 오래된 것도 좋지만, 오늘 담근 겉절이 김치가 더 맛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순간 순간을 진실 되게 사는 것이 좋다"며, “솔직한 삶을 멋있게 살고 싶어요"라고 털어놓았다. 멋있게 사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 아닌가? 김 감독의 멋있게 산다는 것은 적어도 위선적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연적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고 하는데, 때론 야성적으로 때론 본능적으로 되돌아가 “자연적으로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이른 저녁 시작했던 인터뷰가 무르익어 갈 때였다. 한 관객이 요즘 자신은 너무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 역시도 아무런 대책이 없고, 혼란스럽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혼란의 시기는 젊은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불안하고 확실하지 않아도, 젊은 시절 무언가를 하려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김 감독은 너무 젊어서 완벽해 버리면 징그럽단다. “젊은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더 때가 묻었으면 좋겠어요"라던 그 말이 수줍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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