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우리사회에서는 타협이나 절충을 변절이나 비굴로 보는 듯하다. 그래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온갖 극단적인 행동과 발언이 횡행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경우, 극언(極言)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마치 용기있는 정치인의 능력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극단은 결국 양쪽이 모두 망가지는 충돌을 가져올 뿐이다. 물론 국가나 민족문제 등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타협이란 한 국가나 사회 내의 집단간 갈등에 한(限)한 것이다.

  중국에‘교주고슬(膠柱鼓瑟)’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의미는 ‘안족(雁足)을 아교칠하고 슬(瑟)을 연주하다’이다. 안족이란 기러기발을 닮아 생긴 이름인데 중국고대의 현악기에 사용하는 도구로서, 우리나라의 가야금 줄 밑에서 줄을 고여 음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나무도막과 같은 것이다. 악공(樂工)들은 연주를 하기 전에 그날의 장소와 상황에 따라 안족을 앞뒤로 옮겨 가며 악기를 튜닝하여 사용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잘 튜닝된 악기가 마음에 들어 안족 아래에 아교칠을 해 악기와 고정시켜버린다면 상황이 틀린 다음 연주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사도 비슷하다. 어느 한 장소나 상황에 잘어울렸던 언어와 행동이라도 다른 곳에서 다시 잘 어울린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긴 시간 속에서는 반드시 어울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대충대충 시류(時流)에 어울려 의지없이 살라는 것은 아니다. 악공이 좋은 연주를 위해 부단히 튜닝을 하듯, 우리는 소속된 사회의 멋진 발전을 위해 한 때 옳았던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지 말라는 것이다.

  장자(莊子)는 여기에서 한 발짝 더나아간다. <莊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느 날 장자가 제자와 함께 산길을 걷고 있는데 나무꾼이 한 나무를 보면서 “이 나무는 틀렸어, 재목감이 될 수 없겠어”하면서 베지 않고 지나치는 것을 봤다. 저녁 때 즈음 장자와 그 제자는 마을의 한 친구 집에 들렀는데, 친구가 기러기를 잡아서 대접하려 했다. 하인이 “주인님, 우는 것과 울지 않는 것 중에서 어느 기러기를 잡아 요리할까요?”라고 묻자 주인이 “울지 않는 놈을 잡아 요리해라”라고 했다.

  다음 날, 제자는 장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제 나무는 소용없는 것이 베이지 않고 목숨을 건졌는데, 기러기는 우는 재주가 없는 것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이었다면 쓸모 없는 것과 있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의 입장을 취하시겠습니까?”그러자 장자가 대답한다. “그렇구나. 나는 쓸모있는 것과 없는 것, 양쪽의 중간에 있도록 할까. 그러나 사실은 그런 식으로 망설이는 것 자체가 좋지 않은 것이니라.”

  장자는 이 우화(寓話)에서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특별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그는 ‘한 가지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서 진퇴양난의 길에 서 있는 고루함’을 연출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릇을 사용할 때, 그릇의 안쪽 빈 공간이 필요할 때도 있고, 딱딱한 그릇의 둘레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이로울지 모르니 대충 살자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유연하게 갖자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과거, 나만 옳다고 주장하며 극단적인 행동양식을 보여줬던 남미나 동남아시아의 많은 지도자들이 결국 국가를 구렁텅이에 몰아 넣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상적 농업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전국민의 10%를 학살한 ‘크메르루즈’가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그렇다. 인간들의 문제에서 타협이나 절충은 결코 변절이나 비굴이 아니다. 이것의 활용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더 성숙한 곳으로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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