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문화 중에서 혁명적인 것들이 몇 개 존재했는데 그 중 문자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명이 대표적이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로 찍어내었다는 (1234년, 고종 21) 최윤의의 <상정고금예문>은 독일의 구텐베르크 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방법이긴 하나 지식과 문화를 전달하는 매체는 책이다. 물론 대부분의 역사는 말등에 올라 탄 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인류역사를 바꾼 인간의 지적활동은 대부분 종이 위에 문자가 인쇄되어있는 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책을 읽게 되면 지식의 폭이 넓어진다. 자신이 공부하고 일하는 분야이건 다른 분야의 것이건 간에 더 많은 지식을 갖게 해 주고 많은 것들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미지의 세계로 여행도 갈 수도 있고, 2700년 전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를 읽으며 다른 시대에 살 수도 있고,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영적인 나들이와 우주를 관통하는 여행을 할 수도 있으며, 많은 저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기에 근대철학의 아버지이자 뛰어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데카르트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의 훌륭한 선인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책은 문학이라는 거대한 장르와 접할 수 있게 해 준다. <교양빌딩>의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사랑은 문학을 통해 전파되고 문학에서 습득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문학의 사촌”이라 했으니, 사랑과 문학이 동일어이고 문학이 곧 책이라 하겠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들 하는데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책을 접할 수 있다. 송나라 시대의 정치가이며 학자인 구양수는 독서를 위한 삼상(三上)의 좋은 점을 강조하였다. 삼상이란 말을 타는 동안, 침대 위에서, 화장실에가서 앉아 있는 동안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를 마상, 침상, 측상이라고 표현하였다. 어떤 생각을 정리함에 있어서 이 삼상 시간대가 가장 좋다고 한다. 이젠 마상보다는 차상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버스에서 정차하는 동안 읽어도 시집 한 권을 족히 읽을 것이고 운전하면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좋은 시 서너 개는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버스를 기다리며 읽는 책은 오히려 버스가 늦게 오기를 바랄 수 있을 만큼 즐거운 적도 없진 않을 것이다. 이처럼 늘 책을 읽을 기회는 있기에 항상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폴레옹은 성공한 후 바쁜 나날 속에서도 책 읽기와 글을 쓰는 시간만은 꼭 가졌다고 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늘 배우는 자세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공하려면 책을 읽어야한다. 그러나 요즘의 청소년은 책보단 TV나 인터넷 게임에 열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TV의 영상의 속도가 뇌의 자극욕구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주의력을 흡수한다. 때론 그것이 마약과 같이 작용하고 자극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지 않으면 즉시 금단현상이 일어난다. 때론 선생님을 연예인에 맞춰 판단하고 수업이 재미 없으면 내팽개친다. 책에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독서습관도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들의 독서는 고통이 된다. 결국 문자문화가 없는 영상문화로 더욱 빠져버리고 삶이 황폐해진다.

  용혜원 시인은 “삶은 한 권의 책과 같다. 바보들은 그것을 아무렇게나 넘기지만 현명한 사람은 차분히 읽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 한 번밖에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바야흐로 맑은 초록빛이 중후한 갈색으로 다가오는 가을이다. 책을 접하고 읽기에 더 없이 좋은 계절이다. 단 한 번뿐인 삶이라는 무대에 대본 없이 던져진 배우로 살아가는 우리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점에는 따끈따끈한 새 책들이 미캐니컬한 잉크냄새를 풍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느끼며 살기엔 우리들의 오디세이아-여정-가 짧은 게 안타까울 뿐이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