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아온 지난 모든 세대에서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비탄의 소리와 말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아직 계몽되지도 못했고, 앞으로 계몽될 뚜렷한 희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무지(無知)와 허위, 오만과 편견, 갈등과 전쟁은 인간들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들 사이의 평화란 아득하기만 하고, 평화 없는 온갖 분쟁 속에서는 어떤 다른 문제들도 해결될 수 없다. 서양의 계몽주의 세기에 인간이 마침내 성숙되었다는 칸트의 평가도,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진 극도의 잔인한 행위들 앞에서는 무색하기만 하다.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행해진 대량학살은 고사하고, 신의 이름으로 아이들과 여자들까지도 무참하게 살육하고 있는 알제리 회교원리주의자들의 경건한 잔인성과 보스니아 내전이 보여준 인간의 지적인 야만은 신세대 철학자인 글룩스만을 절망케 한다. “21세기의 문턱에서 나는 울지 않는 수 없었다.”는 그의 비탄의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21세기의 우리는 인간의 새로운 잔인성에 또 다시 절망한다. 이제 우리는 고전적 「비극(悲劇)」을 말할 수 있는 힘도, 저 오래된 「비가(悲歌)」를 노래할 마음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지 새로이, 그래도 「비가」를 노래했던 과거를 회고해 볼뿐이다.
20세기초, 1912년 아드리아해가 내려다보이는 두이노성에서 시작된 인간에 대한 비탄의 소리가 찬양의 소리로 1922년에야 완성되는 「두이노의 비가」에서 우리는 다시,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비참함과 복됨, 모두가 결국은 인간성 속에 내재해 있게 되는데, 인간의 비참함에서 복됨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을 「두이노의 비가」는 보여주고 있다. 릴케가 걸어갔던 길이, 영혼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한 상징주의이기도 하지만, 인간성에 내재한 감정능력을 구원의 가능성으로 끌어올린 그의 생각은 옳은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제 인간의 구원은 누구에 의한 어디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닌, 인간 스스로에게서 찾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비가」에서 이성능력이 세계를 대상화하는 능력이라면 감정능력은 세계를 내면화(內面化)하는 능력이다. 감정은 세계를 느껴주고 수용함으로써 세계공간을 내면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그러한 세계의 내면화야말로 사물과 인간의 합일을 가능하게 하여, 구별과 이별, 죽음과 사라짐의 “해석된 세계”에서 지속과 영원성이 깃드는 구원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인간들 중에 그러한 감정능력을 더 가진 자들이 바로 사랑하는 자들이다. 사랑의 감정을 가진 그들은 더 넓은 심정공간을 가진 자들이기에 세계공간을 내면공간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더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 새로운 존재공간이기도 한, 감정의 내면공간에서 인간구원의 가능성을 끌어내고 있는 릴케의 독특한 세계관과 인간관은, 인간성이 극도로 상실되어 가는 이 시대에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겠다.
인간의 위기, 인간성의 위기는 인간이 인간에게 공감(共感)하고, 동정(同情)하는 감정능력을 상실하는 데에서 온다. 분석하고 구별하는 완고한 이성의 빛이 인간 고유의 본질적인 능력인 감정과 상상력을 몰아낼 때 남는 것은 속도와 효율, 가시적 업적주의와 현실적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냉혹한 기계적 시스템뿐이다. 감정이 없이는, 가치들과 문화들 사이의 공존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공감과 이해도 사라진다. 공감과 이해가 사라질 때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공존이 불가능하다면 인간의 생존도 바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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