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언어는 공통점이 있다. 돈과 언어는 사람들 간의 상호교류를 증진시키고 좀 더 편리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언어가 있기에 이를 매개로 상호간 의사전달을 하면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 쉽게 협조적 관계를 이끌어 내듯, 상호간에 안심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돈이 있기에 거래가 단순화되어 누구든지 교환의 편익을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은 모든 경제적 거래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돈은 변했어도 우리가 즐겨 쓰는 돈에 관한 언어적 표현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언어를 통해 그 옛 자취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예를 들면 가진 돈이 전혀 없음을 강조할 때 흔히 “땡전 한 푼 없다”고 말한다든지 저축을 홍보할 때 “푼돈 모아 목돈 마련" 등이라는 표어가 그 실마리이다.
‘푼'은 우리 나라에 근대화폐 즉 신식화폐가 등장하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조선통보·상평통보 등을 일컫는 엽전 한 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10푼은 1전(錢)이며 10전(錢)은 1량이 되니 1량이면 100푼이었다.
또한 ‘땡전'은 고종 3년(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에 그 막대한 경비조달 등을 위해 당백전을 제조·통용시킨 데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당백전은 실질가치가 상평통보의 5∼6배에 불과한 반면 그 명목가치는 실질가치의 약 20배에 달하여 발행초기에 쌀값을 6배로 폭등케 하는 등 국민들의 생활을 극도로 피폐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당백전'에서 ‘당전'을 거세게 발음하여 ‘땅전'으로 다시 ‘땅전'을 ‘땡전'으로 보다 격하게 발음하게 되어 그 ‘땡전'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이처럼 돈은 언어와 같이 아주 오랜 시기부터 우리의 삶 속에 함께 발달해 왔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주전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성종 15년(996년)에 철전으로 ‘건원중보 뒷면 동국'을 주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건원중보는 중국의 당숙종 건원 2년(759년)부터 주조된 것이다. 중국전과 고려전의 구별의 어려운 관계로 뒷면의 '동국'자를 앞으로 내어 ‘동국중보'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주화가 되었다. 이로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 동국통보, 해동원보, 해동중보, 해동통보, 삼한중보, 삼한통보 등 8종이 주조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왕조에서는 ‘조선통보', ‘십전통보', ‘상평통보'를 발행하였다.
조선통보는 세종 5년(1423년)부터 인종 11년(1633년)까지 걸쳐 주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해서체 조선통보와 팔분서 조선통보로 분류된다. 조선시대 최초의 동전인 해서체 조선통보의 발행을 보게 되는데, 그 당시 정부는 조선통보의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조선통보 전용령'을 공포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잘 유통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엔 면직물류의 포화(布貨)가 지배적인 국폐로 유통되고 있었으며, 소액 거래에는 미두(米豆)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발행된 상평통보는 기록으로 보아도 우리 나라 화폐사상 최장기간 유통된 화폐였는데 조선시대의 화폐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평통보는 숙종 4년(1678년) 이후 고종 25년(1888년)까지 2백여년 동안 주전소의 약호, 숫자, 천자문, 부호의 표시등 다양하게 변화했는데, 이 변화에 따라 세분하면 무려 3천여종이 된다. 조정에서는 상평통보의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종래 현물로 바치는 것으로 국한하였던 조세를 대동미등 일부 전납을 허용하면서 점차 그 통용이 확대되어 17세기 후반 이후부터 화폐경제가 상당히 발전하게 되었다.
<개항 후>
근대에는 많은 외국상인들이 왕래하게 되어 개항장에서는 그들이 가지고 온 화폐가 널리 유통되게 되었다. 당시 외국화폐로는 일본의 일원은화, 중국의 마제은 등이었으며 그 소재는 모두 은인데 반해 우리 나라의 상평통보는 구리로 만들어져 있어 국제 거래상 아주 불편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고종 19년(1882년) 우리 나라에서 최초의 은화인 대동일전, 대동이전, 대동삼전이 제조되어 전근대적인 상평통보와 근대적 화폐라고 볼 수 있는 대동은전이 나란히 유통되었다. 그러나 대동은전은 발행직후 퇴감되거나 해외로 유출되어 유통계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게다가 주원료인 마제은마저 품귀현상으로 대동은전 제조에 차질을 빚어 고종 20년(1883년) 6월에 이르러 주조가 정지되었다.
<현대시대>
1910년 한일강제 합방 후 우리 나라의 주화는 자취를 감추었고 일본이 발행한 주화를 사용했다. 해방 후 군정 법령에 의하여 조선은행 법이 유지되어 화폐가 과잉 발행되었다. 전쟁 중에도 과잉 발행되는 화폐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1950년 6·25동란 이후 급등을 계속하던 물가가 1958년에 이르러 크게 안정되고 산업생산도 안정된 성장을 계속하여 화폐가치에 대한 신임이 크게 확보되자 한국은행은 화폐체계의 정비와 제조비 절감 및 소액거래의 용이를 도모하기 위하여, 1959년 10월 미국 필라델피아 조폐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가 삽입된 청동화 십환, 백동화 오십환, 니켈화 백환을 발행함으로써 실로 반세기만에 우리의 주화가 재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1966년 한국조폐공사의 기술에 의해 십원, 오원, 일원등 3종의 주화가 제조되었으며 1970년 11월에 100원주화, 1972년 12월에 오백원 백동화가 발행되었다. 1982년 6월에 통용주화로서는 최고액면 주화로 오백원 백동화가 발행되었으며, 이어서 1983년 1월 신화폐 체계정비에 의한 새 얼굴의 주화 5종이 발행되었다.
이처럼 시대를 달리함에 따라 화폐의 모습도 다양하게 변화하여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단 한푼의 돈이라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껴쓰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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