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이 멈추지 않듯, 우리의 삶은 어제, 오늘, 내일로 지속된다. 지속되는 흐름 속에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라는 그 찰나적 순간은 우리의 삶 속에 선명하게 기억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또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느낌을 원하는 시간이나 공간 속에서 조작해 낼 수 없다. 사랑은 잠재된 에너지원인 듯 우리 몸 구석에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쳐들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면 당사자를 비롯한 주위 모든 사람들은 ‘아, 이제 곧 결혼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 사랑하면 점차 공유의 범위가 넓어질 것이고, 상대를 보다 더 소유하고픈 욕망이 생길 것이다. 더욱이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성적 욕구를 정당화시켜 준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우리 사회에서의 사랑과 결혼의 순탄한 과정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삶이란 정석대로 진행되어지지만은 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혹은, 불현듯 눈앞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가정이라고 하였으나 인간이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는 최대 기간이 3개월 여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를 고려해 볼 때 사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하다. 다만 이러한 사태(?)를 외면하거나 속으로 삭이는 사람이 대부분일 뿐이다.

  인간의 관계란, 그리고 가정이라는 사회적 기초 조직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망 같아서 한 순간의 감정으로 박차고 나오기엔 상처가 크다. 리첸과 차우가 서로에게 사랑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눈물 지으며 돌아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는 각자 따뜻하지는 않지만 의무로 점철된 가정이 있고, 지루하지만 안정된 생활의 패턴이 있는 것이다. 리첸의 화려하고 타이트한 차이나 원피스와 눈가를 가로지르는 짙은 아이라인, 차우의 반지르르하게 정돈된 머리카락과 흰 칼라가 돋보이는 양복은 반복되는 일상의 단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지리한 일상의 반복을 통해 그들이 결코 행복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리첸과 차우가 상황 재연식 거리두기를 탈피해 자신들의 욕망에 이끌려 싱가포르로 함께 떠났다면 그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멈칫하게 된다. 그들이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도 또 다른 일상의 반복과 무력감이 재생산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는 그들의 안타까운 몸짓과 젖은 눈에서 가슴 아린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앙코르와트 사원 틈새에 가만히 입을 대고 리첸과의 기억을 쏟는 차우의 모습을 통해 다시 한번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라는 이 영화의 제목을 떠올리게 된다. 아픔이 묻어나는, 그렇지만 잊혀지지 않는 사랑의 기억들이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감싸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너무도 단호하게 ‘기억은 기억일 뿐’이라고 말한다. 4년 전의 모습 그대로인 좁은 복도와 붉은 카펫 위에, 어두운 밤 갸냘픈 빛을 발했던 가로등 아래 리첸과 차우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그들의 사랑을, 그리고 그들의 선택을 옳고 그름이라는 획일적인 잣대로 그어내릴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서로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사랑의 기억을 체득한 채 현재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