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지만,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에 있어서 큰 문제 중 하나가 묘지였다. 한반도에는 무덤이 이 산 저 산에 흩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농림업은 물론 철도 건설이나 군사기지 설치, 광산 개발 등 여러 가지 개발 사업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912년에 총독부는 ‘묘지 화장장 화장 급 매장 취체 규칙(묘지규칙)'을 제정하여 지방행정단체가 설치한 공동묘지에 매장하는 것과 매장자 이름이나 관리자 이름, 주소 등을 기록한 묘적의 제출을 의무화했다. 총독부는 묘지규칙 공포의 이유로서, 흩어져 있는 분묘들을 정리함으로써 토지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 공동묘지에게만 매장함으로서 묘지를 둘러싼 소송인 산송(山訟)을 막을 수 있는 것, 묘지 주위에 식수함으로써 경관을 미화시키는 것을 강조했다.
총독부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반면에 조선인들은 공동묘지로 매장하는 것을 피하려고 애썼다. 특히 아이가 죽었을 경우 공동묘지에의 매장을 피하는 조선인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반응은 공동묘지와 묘적이라는 제도가 원래 조선인의 관습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말해준다. 즉 공동묘지는 일정 구역에서 죽은 사람을 다 매장하는 곳인데, 어린이가 죽은 경우에는 애기무덤을 만들어 따로 쓰는 예가 많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공동묘지처럼 친족집단과 관계없이 매장하는 산림이 있었고, 일본 관료는 그러한 산림을 중심으로 공동묘지를 설치했다. 그러나 거기는 좋은 자리를 찾아다닐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매장하는 장소였고 그리 선호된 묘지가 아니었다. 또한 생전의 주거와 상관없이 누구나 매장할 수 있고, 관리자도 없다는 점이 일제시대 공동묘지와의 차이점이다.
즉, 공동묘지나 묘적이라는 방법으로 죽은 자를 국가가 관리하는 제도는 총독부가 도입시킨 것이다. 결국 조선인들의 공동묘지 기피 행동은 새 제도에 익숙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총독부는 이에 대해 ‘미신', ‘오해', ‘통폐' 등 아주 부정적인 어휘로만 언급하였다.
결국 1918년 1919년 두 번에 걸쳐서 법을 개정하여 일부 기존의 사설 묘지가 인정되었으나 경제적 이유로 사설 묘지를 가지지 못했던 서민층은 할 수 없이 공동묘지에 매장해야 했다. 1920년대 이후 서울에서는 어느 정도 화장이 보급했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위법임을 무릅쓰고 공동묘지 이외에 매장하는 예는 끊이지 않았다.
이처럼 일제시대의 묘지정책을 볼 때, 현재 언론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장추진 캠페인과 너무나 닮은 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묘지로 인해 토지이용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거나 묘지는 보기 싫으니깐 나무를 심어서 조경 해야 된다는 담론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죽음이나 죽은 자, 그리고 묘지를 쓸데없는 존재로 보는 아주 근대적인 시각에 입각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자나 사회학자 등에 의해 진행된 서양 사회의 죽음과 묘지에 관한 연구 성과에 의하면,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멀어지고 죽음을 은폐하게 된 것은 사회가 근대화하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한다. 전통 사회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별하기 위한 여러 가지 터부는 있으나, 죽은 자라는 존재가 사회 안에 자리잡고 있던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 후 죽음이나 죽은 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러 가지 제도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장례식을 치를 때 관 안에 있는 고인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옷도 입혀주고 화장도 한다. 공원 묘지는 나무나 잔디로 장식되어 말 그대로 '공원'이다. 거기서는 산 사람의 모습이나 자연 경관 등의 '생명'으로 '죽음'이 갈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한 사정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전 근대적인 전통에서는 주검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조상 산소는 동네 가까이도 많이 있었고 어린이들은 거기서 놀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들을 살펴보면 묘지는 그저 단순히 피하기만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한경구와 박경립은, 묘지가 귀신이 나타나는 장소라는 이미지를 갖게된 것은 일제시대 총독부가 공동묘지 제도를 강요한 후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거 농경사회와 다른 현대사회에 맞는 장묘 문화를 만들자'라는 식의 말들은 일제시대나 해방 후의 역사에 대한 검토가 없고, 조선시대 이후 여러 정부가 묘지 단속을 위해 애써 왔다는 사실을 과소 평가한 데어서 나온 말이라고 여긴다.
나아가, 묘지를 무서워하고 피하려고 하는 태도는 지극히 근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국인의 묘지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인 것으로 보는 점에 모순이 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서양학자들의 지적과 달리, 구미의 장묘 문화를 산 자와 죽은 자의 어울린 장소로 칭찬하면서 말이다.
단순히 화장 추진 정책의 흠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여러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단지 묘지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 언론 등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을 걱정한다.
특히 제주도의 경우 묘지를 둘러싼 사정이 육지와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육지에서는 산지에 묘지를 조성하면서 산림이 파괴된다고 하는데, 제주도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최근 많이 생긴 가족공동묘지는 나무를 베면서 만든 경우도 많지만, 전통적으로는 밭이나 방목지에 많이 산을 썼다. 거기서는 굳이 나무를 벨 필요 없이 묘지를 만들 수 있다. 오히려 골프장으로 개발될 때 묘지주가 반대할 정도라면 제주도의 묘지는 환경을 지키는 역할까지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묘지는 무섭고 피해야만 하는 존재였다면 제주도 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소, 말을 방목하면서도 무서워했을 것이다. 밖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무덤 바로 옆에서도 휴식을 취할 정도 묘지는 익숙해진 존재가 아닐까. 또, 사진작가 강정효 씨의 작품집 「섬땅의 연가」(파피루스, 1996)에서 볼 수 있듯이 제주의 자연과 무덤이 얼마나 어울리는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양의 공원묘지에만 ‘산 자와 죽은 자의 어울림'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문화를 바꾸려고 한 것이 총독부로 인한 공동묘지제도 도입이었고, 그것이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이유는 토지이용을 효율화하더라도 식민지하에서는 공동묘지에 매장해야 했던 당사자들이 그 이익을 거두기를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현재 화장이 보급되어 땅에 여유가 생기면 그 땅은 누가 이용해서 어떻게 쓰게 될 것인가. 묘지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여러 측면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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