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애환 녹아든 작품활동 벌여

 

“고국과 일본/ 나 사이에 얽힌/ 거리는 서로 똑같다면 좋겠지”

적당한 바람을 타고 울리는 시는 청중들의 귓가에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난해 11월 ‘재일제주작가와 떠나는 4·3 문학기행과 시낭송회’에서 오른 용눈이 오름. 화산구 안에서 들려오는 시는 참가한 사람들의 눈을 감고 침묵하게 한다. ‘와’라는 작은 탄성을 불러일으킨 시. 그날의 감동은 기자를 김시종(78) 시인 앞에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줬다.

재일제주인 작가들의 대부, 대시인이라는 큰 수식어는 만남을 준비한 기자에게 부담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이 전의 ‘재일제주작가와의 만남’ 강연에서 “나는 80이 내일 모레인 늙은 재일동포다”라고 소개한 말이 떠올라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김시종 시인..?’ 일본에서의 유명세와 달리 한국에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김시종 시인은 재일제주인에 대해 6개월이 넘도록 공부한 기자에게 아직은 낯설다. 일본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탓에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기자에게 김 시인은 “이제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에서 <경계의 시>를 번역해 출판을 앞두고 있다”는 새 소식을 전했다.

4·3사건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김 시인 뒤에 붙은 수식어가 있기까지 힘겨운 활동을 해왔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 활동가라고 알고 있던 것과 달리 김 시인은 “난 조총련에서 반조직행위자 또는 민족허무자라는 꼬릿말이 붙었다”며 뜻밖의 대답을 했다.

지난 1955년 조총련이 개편돼 노선전환 이후 김시인은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 되자 이탈하게 됐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미군에 의해 폐쇄 됐던 민족학교를 다시 여는 일을 맡아 학생들을 직접 모집하는 등 노력해 학교를 열고 조선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 때 조총련과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한 그는 “조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똑같이 시키고 결혼식 하나에도 획일화 시키는 김일성에 대해 비판했다”며 “10년 동안 고립된 생활을 했다”는 그의 말에 그 당시 양쪽 대립이 무척 치열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다. 한국의 군사정권을 비판하고 5·18 광주항쟁의 내용을 담은 시집 <광주시편>를 편찬해 곱지 않은 시선들이 많았다.

“나는 한국에서 반한군자이자 공산주의 책동자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 산소도 모르고 지내다가 돌아가신 후 40년 만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후 한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지난 일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어오던 그는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북초등학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유년기 시절 뛰놀던 곳이 많이 변해 씁쓸해 하는 눈치였다. 김 시인은 “북초등학교 앞에 서니 안보이던 빌딩들이 보이고 자주 놀러가던 탑동은 매립이 되어 가게들이 늘어져 있다”며 “기억에 남아있는 옛날 모습들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호텔 로비에서 시작된 기자와의 대화는 사람들이 북적일 때 쯤 끝이 났다. 3박 4일의 여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채비를 하는 그의 뒷모습에 지난 날 강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주를 사랑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강연을 듣는 동안 궁금했던 말을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김 시인을 다시 만날 날이 있음을 기대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정선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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