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능력을 키워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길”


 -교수님께서 학생으로 제주대를 다니실 때 학과생활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해주십시오.

“나는 노는 것을 좋아하는 대학생이었다. 70년대는 아직 의무발령이 행해지던 시기로, 사범대에서는 공부하는 새내기를 찾기가 힘들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제주대 캠퍼스는 용담에 있었는데, 정원인 550명 중 제주시에서 통학하는 350명은 교문 입구를 따라 늘어선 ‘고망술집’에서 출석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아는 사람들이 있는 술집에서 막걸리를 한 주발씩 얻어 마시면서 등교하다보
            현승환 교수               면 강의실에 들어설 때쯤엔 이미 취해있기가 일쑤였다.”


 -교수님께서 제주대를 다닐 때에도 동아리가 활성화 되어 있었고, 교수님께서는 어떠한 동아리에서 활동을 하셨습니까?

"지금 동아리가 아무리 끈끈하다고 해도, 그때처럼 끈끈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활동했던 제주도문제연구회(이하 제연)는 이틀이 멀다하고 술 모임으로 바빴다. 1학년 시절은 선배들이 사 주는 술을 마시러 다니고, 2학년이 되고서는 선배들이 한 것처럼 후배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연애도 제연 안에서만 가능하게끔 분위기가 조성됐다. 동아리 활성화를 위한 선배들의 애정 때문이었다. 2학년 1학기, 총 세 학기를 마치면서 군 입대를 결심했다. 군대를 다녀오면 동아리 활동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제주대를 다니실 때는 어떠한 문화생활을 향유하셨고, 어떠한 점에서 미흡했습니까?

“70년대는 파란만장한 시기였다. 술문화도 유별났다. 70년대의 대학생들은 전공서적보다 술자리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의 술자리는 지금과 달리 토론의 장이자, 지식 전달의 장으로써 자리했다. 술자리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맑스의 자본론이나, 해방 전후사의 인식 등 사회과학 서적을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했고, 최인훈의 광장이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책들을 끼고 살아야 했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연애를 이야기하다 철학과 이념으로 이어지고, 종국에는 남북문제를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당시의 학업환경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기계라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런 것도 아니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대단히 큰 변화다. 리포트를 타자로 쳐서 제출한다든지 교수가 판서 대신 유인물을 돌린다든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인지 아마 지금 학생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70년대에는 등록금이 (사범대학 기준) 5만5000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라 학생들에게 학자금 마련 아르바이트 등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지만, 지금의 학생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해야만 했다.”


 -제주대학교가 어떻게 발전을 해나가야 할지, 제주대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현재 제주도에는 제주대, 산업정보대, 탐라대, 한라대, 관광대 등 5개 대학이 존재한다. 해당 5개 대학 중, 제주대가 지역거점대학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은 물론, 탈제주하여 동아시아의 중심이 돼 줘야 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어 능력 향상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점이다. 외국어 능력은 제주대학교에 와 있는 많은 유학생들과 어울리다 보면 외국어능력도 자연히 신장되게 마련인데 학생들이 그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학교 차원에서 유학생과 한국 학생을 엮어주는 멘토링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김로마나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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