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 위에 놓여진 삶 속에서 오늘은 어제가 되고, 지금 이 순간은 과거라는 거대한 기록의 덩어리에 몸을 맡긴다. 오늘을 살아내는 것과 어제를 기록하는 것, 그 간극에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본성이 소리 없이 꿈틀거린다. 그래서 혹자는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국사 교과서에서, TV 드라마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시간동안 역사를 보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역사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과연 그 내용은 진실한 것일까.
지난 16일과 17일 양일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 극예술연구회 창립 20주년 기념공연 ‘제국의 달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성찰의 단면들이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시간은 바야흐로 서기 6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는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코자 백제로 향한다. 김춘추의 야심은 전쟁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희생들을 빛나는 업적을 위한 필연적인 수단 혹은 과정이라 단정짓는다. 그는 후일에 길이 남을 역사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 위해 지금의 칼부림은 정당한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백제는 이미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위태로움을 느낀 관료들은 제 살 구멍 찾기에 분주하다. 그러나 해동증자(海東曾子) 의자왕은 백제의 패망을 역사라는 거대한 줄기에 안착시키며 태연히 삼천 궁녀의 치마폭으로 기어 들어간다. 체념은 그에게 백제라는 무거운 짐을 덜어내 주고, 그를 안식과 쾌락으로 이끈다.
전쟁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디딤돌로서 그 열기를 더해가고, 계백과 관창을 비롯한 인물들의 갈등은 증폭되어 간다. 그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희구하는 충만한 삶에 한 발자국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일까.
이 극을 연출한 박남용 동문은 “역사 속에 숨겨진 인간의 내면을 희노애락을 통해 표현했다"며 “역사는 엄숙한 계명이 아닌, 개개인의 사소한 가치관의 차이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연이 끝난 후 밝은 조명 아래 드러난 관객석은 주말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빈 자리가 많아 아쉬움을 남겼다. 공연문화의 활성화를 바라는 학우들의 목소리가 입에서 맴도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져 함께 했다면 더욱 의미 있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역사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고, 기록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군주와 장수들의 자취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과연 우리의 의지와 바람대로 우리의 역사는 진행되고 있는가.
연일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정치권의 부패상과 불신을 넘어 폭력으로 이어지는 집단간의 갈등은 끊임없이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한다. 어쩌면 우리는 오랜시간 동안 이기와 소유욕으로 점철된 테두리 안에 갇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국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허상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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