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영화 <국가대표>, <해운대>의 포스터 ©
주체할 수 없는 ‘상실’의 늪으로 빠져드는가? 영화 <해운대>와 <국가대표>를 본 후 들었던 생각이다. 두 영화는 현재 한국영화계를 받치는 기둥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잇따른 흥행실패로 투자가 위축된 상황에서 한국영화 제작여건은 잔뜩 얼어붙었다. 장기적 불황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한터에 <해운대>가 천만관객을 넘기는 ‘대박’을 터뜨렸다. 뒤이어 <국가대표>까지 700만 관객을 넘겼다. 두 작품의 흥행이 한국영화를 다시 일어서게 할 ‘희망’으로 작용할 지 관심이 모아진다.

하지만 산업적 호황과 작품에 대한 평가는 별개다. 왜 두 영화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대표적 ‘대중영화’로 사랑받고 있는가? 대중적으로 사랑받을 만큼 훌륭한 만듦새를 보여주고 있는가. 대중들은 두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첫 문장에서 언급했다시피 올해 8월 한국사회를 한껏 달궜던 두 영화를 보며 떠올린 단어는 ‘상실’이다. 굳이 두 영화를 연결하는 공통단어를 찾으라면 ‘상실’로 말하고 싶다. 여기에 상실에 대한 왜곡된 향유의 정서도 공통분모다. ‘상실에 대한 왜곡된 미화’가 대중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한국영화, ‘상실’을 이야기하다

또 다른 천만 관객영화 <괴물>을 떠올리자. 이 영화도 ‘상실’을 그린다. 딸을 괴물에게 빼앗긴 가족들의 분투기다. 하지만 <괴물>이 같은 천만 관객영화인 <해운대>나 <국가대표>와 다른 지점은 한국사회가 무엇인가를 상실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파헤쳤다는데 있다. <괴물>에서는 영화 초반부터 주한미군이 살상용 화학약품을 살포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가족보다 ‘괴물’을 보호하는데 여념이 없는 한국사회 권력의 무기력함과 모순적 행태를 드러낸다.

반면 <해운대>나 <국가대표>에서 등장하는 상실은 ‘상실’에서 그친다. 되려 ‘상실’에 ‘상실’을 덧붙여 부풀리는 격이다. <해운대>는 상실의 정서를 지닌 사람들이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연희(하지원 역)와 자신의 과오로 연희의 아버지를 잃게 한 만식(설경구 역)이 대표적 인물. 여기에 상권을 상실할까 노심초사하는 지역민들이 나온다. 해운대를 찾은 외부인조차 가족을 잃은 상황으로 설정됐다. <국가대표> 또한 가족을 잃거나 희망을 잃거나, 가족을 잃을까 걱정하는 ‘청춘’들이 모인다. 그들을 규합하는 인물은 이미 가족과 집, 경제력에 자존심마저 상실한 무능력한 코치다.

두 영화 모두 한국사회 구조적 모순을 짚어낸다. <해운대>에서 보여지는 지역상권과 대자본간 갈등구도는 자본의 양극화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대표> 또한 은밀히 병역문제를 풍자하며, 가족을 생이별하게 하는 자본의 비정함이 깃들어있다.

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소재, ‘쓰나미’와 ‘스키점프’는 영화 속 ‘상실’과 ‘모순’을 해소할 ‘정화제’이자 ‘해결책’이다. <해운대>는 ‘자연현상(쓰나미)’으로, <국가대표>는 ‘제도(금메달 획득 후 병역혜택과 아파트 구입)’로 해결하고자 한다. 이런 해결방식이 관객들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는 <해운대>는 ‘가상현실’이고, <국가대표>는 ‘실화’를 기반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표>가 이미 예정된 현실로 향하는 반면 <해운대>는 판타지를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해결책으로 보이는 두 영화의 ‘판타지’와 ‘현실’은 사실 ‘상실’로 수렴되는 결과를 맞는다. <해운대>에서 가장 중요한 판타지인 ‘쓰나미’는 모든 것을 쓸어간다.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채로 출발한 이들이 ‘쓰나미’로 더 큰 상실을 겪는 이야기다. ‘쓰나미’가 몰아친 후 결말 부분에서 갈등이 봉합되는 과정이 그려지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또 다른 더 큰 ‘상실’의 상처를 입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국가대표> 속 청춘들 또한 금메달 획득에 실패함으로써 ‘상실’의 상처가 덧붙여진다. 가족과 이별은 지속되고, 희망은 언제다시 올지 모른다. 군대도 정상대로 가야하는 입장이다.

상실을 극복하는 가장 ‘나쁜’ 방식

관객들은 두 영화를 보며 웃고 울고 즐기는 사이 어느새 두 영화에서 배어나온 ‘상실’의 정서를 공유한다. 그것도 말끔히 해소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상실’이 얹혀진 정서를 받아안은 것이다.

<해운대>와 <국가대표>를 통해 이미 한국사회 내에 ‘상실’의 정서가 만연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실에서 그 정서가 워낙 무겁다보니 영화에서 만큼은 ‘상실’을 웃음과 눈물로, 비록 비현실적으로 미화했다 하더라도 그나마 받아들이기 쉬운 감정적 무게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대중의 욕구를 읽을 수 있다. 문제는 ‘상실’이 해소되는 방식이다. 특히 <해운대>는 현 시대에 잠재한 불안요소를 감지하게 한다. ‘쓰나미’가 몰아쳐 모든 상실과 모순을 쓸어버리는 방식. 더 큰 상실의 파고가 닥칠 것을 알면서도 차라리 ‘쓰나미’가 몰아쳐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게 낫다라고 안도하는 방식. 가상현실을 그린 <해운대>에서 작용한 판타지는 ‘상실’의 판타지이지, ‘회복’이나 ‘위로’의 판타지가 아니다.

어쩌면 시대를 사는 이들은 ‘상실’을 극복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해소책을 찾지못해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극단적인 해결방식의 판타지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스키점프는 성공적으로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체념해버린 것은 아닐까. 이미 ‘상실’은 극복불가능한 상태가 돼버렸는가. <해운대>와 <국가대표>가 흥행기세를 올리지만 결코 즐겁지 않은 풍경이다. 되려 불안하고 하루가 아슬아슬한 이 시대 대중들의 자화상을 확인하게 한다.

이영윤 특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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