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예술수용」 김병택 국어국문학과 교수 ©
릴케의 두이노의 다섯 번째 비가(悲歌)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들은 누구인가, 나에게 말해다오, 그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우리들보다 조금 더 빨리 사라지는 그들은.” 「두이노 비가」의 비탄은 인간이 사라지고, 소멸하고 이별하는 존재라는 데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우리들보다 더 빨리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유랑하는 광대들이다. 피카소가 그린, 허허벌판에 서있는 「광대가족(Saltimbanque)」 그림이 제5비가를 쓰는 릴케의 상상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슈베르트는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가 책상 위에 놓인 시집을 우연히 발견한다. 그 시집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읽는다.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스톨베르그(Stolberg)의 “물위에서 노래함” 이라는 시로부터 슈베르트는 참으로 아름다운 가곡을 창조해 낸다. 물결이 춤추는 듯한 시의 리듬을 그대로 선율과 피아노 반주로 살려낼 뿐만 아니라, 사라지는 시간과 물결 위에서 노래하는 영혼의 영원에로의 동경까지도 소리로 표현해 낸다.

장꼭또는 릴케의 시를 읽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지상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연관(聯關)들이 사라지려 한다는 이미지를 보고, 그가 만든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가 사는 오래된 성관의 창문 커튼들이 바람에 날리는 훌륭한 영상을 만들어 낸다. “거울 뒤로 누가 걸어갈 수 있을까?”라는 릴케의 쏘네트의 시행은 “오르페우스” 영화에서 거울이 물결처럼 흔들리고 거울 속으로, 죽음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시인의 영상으로 나타난다.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신비하고도 깊은 상상력의 창조과정을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정신과 정신이 만나서 예술작품이라는 아름다운 불꽃을 만들어 내는 모습은 찬탄할 만하다. 그 예술의 불꽃, 예술의 불빛 속에서 우리의 삶은 어둠과 공허로부터 보호받는지도 모른다. 시와 그림, 시와 음악, 시와 영화, 그리고 시와 무용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더 아름다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간다. 이러한 현상과 문제들을 깊이 있게 조명하는 책이 나왔다.

우리의 현대시에서 시와 다른 영역의 예술들이 시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시가 그 예술들을 어떻게 수용하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이번 김병택 교수가 펴낸 「현대시의 예술수용」이다. 한국 현대시 비평으로 이미 많은 논저를 펴낸 저자가 이제는 그 시야를 넓혀 다른 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통찰력을 광범위한 예술 영역을 넘나들면서 펼쳐 보여주고 있다. 시비평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연구 분야에서 아직까지 이러한 광범위한 비교예술론이 집필된 것을 나는 본적이 없다. 이 책은 시가 다른 예술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의 문제를 넘어서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려는 저자의 숨겨진 의도도 담고 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 서양의 큐비즘,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그리고 추상예술과 전위 예술들이 다른 예술영역으로 서로 침투해 들어가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기존의 예술형식에 대해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은 시각적 포에지와 언어그림으로, 조형예술에서 언어는 그림형상으로 변화되기도 했다. 마침내 오늘날에는 복합매체예술행위라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르렀다. 앞으로 나타날 모든 예술현상들을 이해하고, 예술에 대한 우리의 성찰을 다시 일깨우고, 현재와 미래예술을 예측하고, 예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데에 김병택 교수의 「현대시의 예술수용」은 중요한 자극과 계기, 실마리를 우리들에게 줄 것이다.

김종태 독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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