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원 사학과 교수 ©
작년 WBC에서 이치로로 대표되는 일본타선을 무력화시킨 봉중근 선수는 이를 계기로 팬들로부터 ‘국민 영웅’ ‘봉중근 의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아마도 야구팬들은 일본 야구계를 대표하는 이치로 선수에게서 ‘이토 히로부미’의 이미지를, 그리고 그를 경기에서 완벽하게 제압한 봉중근 선수의 모습에서 의사(義士) ‘안중근’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리라. 올해는 바로 30년 7개월이라는 짧지만 불꽃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안중근의사께서 순국한지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부에서 부 안태훈과 모 배천조씨 사이에서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청년기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 하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운영하는 등 육영사업에 헌신하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바 있다.

29세 때인 1907년, 정미 7조약에 이어 군대가 해산되고 시위대가 봉기하였을 때, 국외활동을 통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자 간도,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한 그는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직을 맡아 연해주에서 본격적인 항일독립투쟁을 시작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당시 한국통감으로 있다가 일본의 추밀원의장이 되어 러시아정부의 재무대신인 코코프체프를 만나기 위해 북만주 시찰에 나섰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체포당한다.

안의사는 조사과정에서 그의 저격에 대한 이유를 러시아 검사신문에서부터 이듬해 2월의 공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일본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밝힌 뒤 사형을 선고 받았고, 항소를 포기하며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형이 집행됐다.


平生營事只今畢 평생을 벼르던 일을 이제야 끝내었음이니

死地圖生非丈夫 죽을 땅에서 생을 도모함은 장부라 하지 못할 것이로다.

身在三韓名萬國 몸은 삼한에 있었지만 이름은 만방에 떨친 것이니

生無百歲死千秋 살아선 백세를 누리지 못하였어도 죽어서는 천년을 가리라.


안중근 의사의 거사(擧事)를 듣고 난 후, 중국의 국가주석이었던 원세개가 지었던 시이다. 안의사의 고귀한 죽음을 외국인인 원세개조차도 역사가 기억해야 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사건을 기록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 관점에서 그 사건이 발생하게 된 수많은 원인과 결과, 그리고 이후 벌어지게 되는 일들에 대한 종합적 분석과 고찰을 바탕으로 미래를 대비하는 학문분야다.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기를 맞이하여 각 매체에서는 안의사에 대한 행적과 의거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미시적 관점에 치우쳐 실용성이 떨어진다며 역사가 홀대받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기본적인 역사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학생들은 스스로 역사적 교양과 안목을 배양할 수 있는 기회를 기피한다면, 우리의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타국인(他國人)들과 만났을 때 그들이 “안중근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 맞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힘썼던 위대한 인물을 저격한 테러리스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욱이 일본은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기로 결정한 지금, 우리의 역사교육은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등한시하여 성실하게 가르치고 배우지 않는다면 안의사의 의거는 ‘이름을 만방에 떨치고 죽어서는 천년을 가리라’던 원세개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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