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광주민주항쟁의 의의’

 

▲양길현(윤리교육과 교수) ©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대통령이 피살되는 충격은, 향후 정국에 대한 불안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라는 이중성을 보였다. 유신체제의 붕괴가 권력 핵심 내부에서의 갈등으로부터 온 것인 만큼이나, 향후 누가 이러한 권력공백을 메워 나갈 것인가의 선제권은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장악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박정희 피살 수사권한을 이용한 합수부의 전두환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함으로써 전두환의 1단계 하극상이 완료되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정치적으로는 12·12의 1단계 쿠데타와 5·17의 2단계 쿠데타 사이의 조정기에 해당한다. 이는 민주정부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압도적인 염원과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사이에서 힘의 균형이 어디로 기울여지느냐의 과도적 국면임을 뜻한다. 이러한 과도적 국면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은 신군부의 권력 장악에 맞서 민주주의를 세우고자 했던 아래부터의 민주화운동이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장기 여정에서 볼 때 광주민주항쟁은 즉각적인 민주정부 수립에는 실패했지만 광주학살의 무모함을 바탕으로 한 한국 국민들의 지속적인 반전두환 민주투쟁의 결과 마침내 1987년 민주정부의 등장을 가져오는 데 공헌을 한 대표적 민주화운동으로 자리하는 데 손색이 없다.

▲사진제공 = 5.18기념재단 ©

 

 

 

 

 

 

 

 

 

 

 

 

 

 

 

 

II.광주민주항쟁의 배경과 과정: 5·17과 5·18

1980년 봄 비상계엄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한편으로는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의 정치적 영향력이 교차·대두하면서 외형적으로는 선거 국면으로 나아가는 정치적 진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권력 장악 움직임도 물밑으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는데,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합수부장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게 되면서 명목상의 최규하 과도정부와는 별개로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임을 대내외에 공식화한 것이 그 대표적이다. 이렇게 친여신당설과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이 제기되는 ‘안개정국’의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 1980년 5월 학생들의 반군부 가두시위는 점점 더 열기를 더해 갔고, 이에 부응하여 정치권도 계엄해제 촉구와 유신헌법 개헌에 합의함으로써 신군부의 정권장악 의도에 제동을 걸었다.

이렇게 학생들과 정치권으로부터의 견제에 직면하여 신군부에게는 무언가의 대책이 요구되었다. 마침 1980년을 전후해서는 마이너스 경제성장이라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가 하면 박정희의 갑작스런 피살에 따른 사회적 불안과 위기의식도 조성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리력과 언론통제를 확보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포고령 10호를 통해 국회와 대학 폐쇄, 모든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파업금지 등을 발표하였다. 포고령 발표의 이유는 학생들의 가두시위로 인해 야기된 혼란을 막겠다는 것이었지만, 이는 곧 신군부의 권력장악 의지와 기획이 발동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5·17 계엄확대는 유력한 야당정치인인 김대중을 체포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 시킴으로써 사실상 12·12 하극상에 이어 군부의 권력장악 의지가 개입된 또 한 번의 쿠데타였다.

5·17 계엄확대에 항의하는 학생 및 시민들의 저항이 광주에서 폭발하게 된 배경에는 호남지역의 소외가 작용하였다. 광주로 대표되는 호남은 ‘지역의 계급화’가 논의될 정도로 박정희 정부의 편향적인 지역개발정책과 인사정책으로 인해 소외감과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소외된 호남의 유력한 정치지도자인 김대중을 정부전복 기도 혐의로 신군부가 체포하자, 이에 반발하는 광주시민의 시위는 자연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시민의 시위에 대해 신군부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상과 진압으로 대응하면서 초기의 반정부 평화적 시위는 전투적이고 생사를 건 자구적 투쟁으로 바뀌어 나갔다.

전국이 계엄령 하에 놓여 있어서 언론이 통제되고 미국마저 애매한 태도로 방관하던 5월 18일 이후의 상황에서 뚜렷한 지도력이나 조직이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한 방어적인 ‘시민군’은 고립되었다.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부재한 가운데 자기보호를 위해 무장했던 광주 시민군은 5월 18일 공수부대 투입 이후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무력진압으로 이어지는 10일 간의 비극에서 철저히 희생되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는 마치 외국인 용병처럼 생명존중이라든가 관용과는 거리가 먼 태도로 학살에 임했다. 이로 인해 사실상 ‘잉여군사정부’를 뜻하는 전두환 정부는 그 집권을 위해 수많은 광주 시민들을 무고하게 희생시켰다는 원죄에서 한 시도 벗어나지 못하는 정당성 결여에 시달렸다.

 

III. 광주민주항쟁의 과제: 민주적 변혁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에서 국가폭력은 자국민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부도덕성을 면치 못하였다. 광주민주항쟁 동안 군부의 정치적 탄압이 폭력적인 만큼이나 저항의 강도도 총격전으로 전개될 정도로 폭력적 양상을 띠었고 이에 따른 신군부의 대응도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등 폭력의 극치를 보였다. 종국적으로 광주시민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로 마무리되면서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추동자로서 광주민주항쟁은 전두환 정부의 부도덕성과 폭력성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1980년대 체제변혁운동의 전투성은 광주민주항쟁이 좌절된 데에 따른 허탈과 분노를 반영하는 것인 동시에 향후 새로운 다짐과 강고한 투쟁방식을 요청하는 민중적 요구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구소련 및 동구사회주의의 실패를 지켜보면서 그리고 1980년대 중반 한국경제의 순조에 영향을 받으면서, 광주민주항쟁은 사회변혁을 의도하는 시민혁명이기보다는 민주화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2010년 30주년을 맞이하면서 광주민주항쟁은 반독재 민주와 함께 반신자유주의 복지로 나아가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광주민주항쟁은 기본적으로 ‘계엄철폐, 전두환 사임, 김대중 석방’을 요구한 국내적 사안이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20일 신군부가 20사단의 투입을 한미연합사에 요청했을 때 미국이 이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에 따라 부산 미문화원 점거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2002년 12월 의정부 여중생추모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광주민주항쟁에서 제기된 바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의 의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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