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돈 철학과 교수 ©
1980년 5월 17일 나는 중앙도서관에 있었다. 그날 낮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치하며 최루탄과 돌멩이가 오가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우리는 해가 지면서 도서관을 점거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1979년 박정희 저격사건을 계기로 권력의 중심에 들어온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정권장악 음모가 노골화되어가던 때였다. 보안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면서 정국은 한 치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혼미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시위의 주된 구호는 ‘신군부세력 척결’이었다. 캠퍼스엔 언제나 메케한 페퍼포그와 최루가스가 떠돌고 있었고, 정상적인 강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날 도서관 1층 열람실엔 대략 300 여 명의 학우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 있었다. 신분 확인이 된 기자들 외 일체의 외부인 출입을 통제한 가운데 우리는 노래를 불렀고, 구호를 외쳤고, 끝도 없는 난상토론을 벌였다. 학생운동은 향후 정세를 어떻게 볼 것이며, 신군부의 음모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불꽃 튀는 쟁론과 설전들이 젊음의 가슴마다 넘쳤다. 그 때 나는 대자보 담당이었다. 대여섯 건의 대자보와 격문을 썼고, 그 때마다 정문 벽보판에 붙여졌다. 그 때 내가 쓴 ‘성전포고문’의 한 구절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학우들이여, 오월 순결한 지성의 피를 민주의 제단에 뿌리고, 우리 모두 저 간악한 신군부세력들과 맞서 싸우자!”라고 썼다. 혈기방장한 20대 청춘이었다.

다음날 5월 18일 농성장에서 우리는 광주로부터 전해진 충격의 소식을 접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부대가 진주하고, 계엄군에 맞서 광주 시내 곳곳에서 대대적인 유혈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우리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그 이후 광주에서 들려온 계엄군들의 엽기적인 만행은 실로 통탄스러운 것이었다. 양심 있는 모두를 시험하고 전율케 한 희대의 비극 앞에서 우리는 절망했다. 신혼의 임산부를 쏘아 죽이고, 매복한 계엄군들이 버스에 총격을 가해 승객들을 몰살시켰다, 도주하는 고등학생을 끝까지 쫓아가 짓밟고 대검으로 난자했다, 는 등등의 끔찍한 소문들은 나중에 모두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 때 몇몇 학우들은 도저히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광주로 향했고, 나는 부끄럽게도 용기가 없어 차마 광주행 버스엔 오르지 못했다.

그 날 함께 철야농성을 이끌었던 같은 과 친구가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도 유난히 목소리가 컸고, 매사에 자신감 넘치던 패기만만한 친구는 이른바 5·18 국가유공자다. 보안사에 잡혀 들어간 이 친구, ‘성전포고문’을 쓴 놈을 대라고, 엠 식스틴 개머리판으로 등짝을 내리치며 고문하던 취조관에게 “내가 다 썼다고”, 죽여라 달려들며 끝내 입을 열지 않더라고, 당시 옆 취조실에서 조사 받던 다른 친구가 전했다. 몇 해 전 이 친구와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 “그 때 네가 사실대로 불었더라면 나도 50% 할인 받고 비행기 탈 텐데”라며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한 세대가 바뀐다는 30이란 세월이 흘렀다. 5·18 민중항쟁 30주년에 참으로 기막힌 뉴스 하나를 접했다. 정부가 공식 행사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로 이어지는 비장미 넘치는 그 노래를 부르며 우리는 그 해 숨져간 광주의 영령들에게 머리 숙이고, 눈물로 민주의 참세상을 염원했다. 그 노래를 한사코 부정하는 것은 이 정권이 오월의 정신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반민주 정권임을 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오월은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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