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하나의 사회라 한다. 모든 조직기구들이 작은 사회를 형성하겠지만 대학처럼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 낸 조직도 흔치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긍·부정을 구분치 않고 내리는 판단이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트랜디한 대학, 나쁘게 말하면 주관없는 대학이라 해야 할까.

이는 현재의 사회 속에서 대학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 할 수도 있다. 혹은 국가가 대학에 이념과 사회의 지향을 따라하도록 강요하는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대학의 본질적 역할과 그 속에서의 개개인의 역할을 혼돈스럽게 만든다. 대학이 언제부터 수익사업에 나섰는지, 평가 중심의 운영을 하였는지는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대학을 위한 구성원이 된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철학적 의미로 보았을 때, 이는 실체만을 좆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표상적 의미의 실체와 어떤 것 속에 숨겨진 내면적 가치를 지난 뜻하는 실재는 우리가 진실하게 지향해야 할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는 말이다.

사실 현재의 모든 사회가 실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자본과 권력으로 치장한 실체들의 가치만이 최우선인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자연히 그것을 우러러 보게 되는 것이다.

실체와 실재라는 글자의 작은 차이처럼 그것의 본의미를 구분해 내기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실재를 지향하는 방법은 실체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대학에 있었다. 진리를 구분해야 한다는 지성들의 외침이 무수한 허구 속에서도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대학에 꺼지지 않은 작은 희망이었다.

대학신문사 활동을 마무리하는 기자에게 그 동안의 시간은 귀중했던 경험들로 대신 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가치는 실재를 생각할 수 있게 된 점이다. 본질적 가치 없는 맹목적 지향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점검하게 된 것이다.

대학신문도 이제 실재를 향해야 한다. 현실 속에서 계속 변화하는 실체들에 이리저리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인간은 실체와 실재를 구분하려는 유일한 존재자라 한다. 그 말은 만물 중 가장 이성적이고 명확한 사고로 판단할 줄 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인간이 실재를 알면서도 실체만을 좆는 비정직한 행동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슬픈 것이다. 알면서도, 현실 때문이라는 말은 이제 버려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권력이든, 꿈이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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