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지 사회교육과 교수
2월이면 또 교수들이 정년퇴임을 하게 된다. 자기 직업을 천직으로 삼고 그 천직에 일생을 바친다는 것은 어렵다. 천직에 걸맞는 지조와 청절을 끝가지 지켜내기는 더욱 어렵다.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는 지식인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지식인은 역사와 사회 발전의 연관성 속에서 그 역할과 몸가짐이 중요한 만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격변의 시대일수록 지식인들은 더욱 타락하기 쉬우며 그들이 끼치는 사회적 악영향도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먹물’, ‘유식한 무식꾼’, ‘정신 빠진 지식기능인’ 등으로 눈총 받는 지식인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과거이며 현실이기도 하다.
 
벗을 얻어 고갯길 넘는 밤
그대는 보름달을 노래하고
나는 나무가 되어 귀를 기울인다
아름다움이 슬프다는 얘기가 있어
마음에 한 줄기 시내가 흘러
달이 밝아서 온 길도 나중엔 흐리었다.
내가 자주 애송하는 ‘달밤’이다. 위 시의 ‘나’는 이별을 숙명으로 받아 들이는 ‘나’도 아니요, 의지의 표상으로 세계를 보는 ‘나’도 아니다. 격변기의 평범한 지식인이 삶이 아닌 지식을 위한 지식인의 해독을 꾸짖으며 진실한 우정과 자연에 접하는 소박한 감정을 고독하게 노래하고 있다. 지식인은 자신이 ‘더불어 사는 홀로’임을 아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든 비판정신이 생명인 지식인에게 존재구속과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는 진실을 보는 눈을 멀게한다. 모든 곳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실은 아무 곳에도 소속하지 않는 고독한 존재가 지식인임을 보여준 지식인이 있다. 2월이면 퇴임하는 김 교수를 볼때마다 고독한 섬이 떠오르고, 고독한 섬이 아름다운 까닭을 깨닫게 한다. 그에게 시는 고독한 영혼의 갈증을 달래주는 샘물인 셈이다.
 
너는 보았니? 마음을
봄 바다 길을 길 잃은 아이처럼 걸어가는 것을
석고상처럼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수천 길 절벽으로 허수아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어두운 황혼에 소리 없이 우는 것을
눈 덮인 밤의 숲길을 무서워하며 걸어가는 것을
달빛 비치는 눈길을 한없이 가고 있는 것을
가슴을 말리며 타오르는 것을
어두운 빗길에 가로등처럼 빛나는 것을
안개 낀 길을 꿈속처럼 걸어가는 것을
바닷가 소나무 옆에 외로이 앉아 있는 것을
햇빛 비치는 정오, 물결치는 바닷가에 서 있는 것을
긴 장마의 암울한 꽃처럼 피어나는 것을
이월의 풍경속으로 날리는 눈발처럼 스쳐가는 것을
4중주의 2악장으로 아침 눈처럼 가슴에 깃드는 것을
어두운 강물처럼 가슴속으로 흐르는 것을
밀납 인형의 잿빛 얼굴처럼 죽어가는 것을
 
김종태 교수의 최근의 시 ‘고독’이다. 탈을 쓰지 않고 있는 진실한 삶과 그 정신 속에 녹아있는 순수함이 보인다. 그가 현실과의 싸움에서 아직은 승리하지 못한 이유도 이러한 순수함과 소박함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상이 곧 시일수는 없으나 시는 사상이 될 수 있다. 그가 퇴임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시집 한 권을 남긴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시 한편으로 그의 철학과 마음을 다 읽을수는 없다. 다만 그의 ‘고독’을 읽는 동안 내 눈 앞에는 태풍으로 파도치는 바다와 고독한 섬이 떠오르고, 그 섬이 고독한 지식인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 왔다. 나는 그 고독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시 한편을 지어 위로하고 싶다.
 
비바람의 남용이고 횡포
배반의 태풍이 일단 지나갔다
제자리에 남은 자는 바다와 섬
바다 한가운데 그대 뿐이다
그대야말로 목숨걸고 지조를 지켜냈다
상처투성이 고립
높푸른 고독 그 자체가 지조다
누가 뭐래도 바다는 안다
돌아서는 가지만 섬을 넘지않는 바다
파도치며 건들지만 섬을 끌고가지 않는 바다
그 바다를 끝까지 믿고 있는 섬의 지조
비바람이 많았던 제주대학의 풍경, 진실을 가리는 짙은 안개 그 풍경 속에서 서로의 배경이 되고 싶었던 김 교수와 나의 관계로 읽어도 좋다. 그 오랜 세월 남몰래 흘린 눈물도, 견디기 힘들었던 고비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딸깍발이 옛 선비처럼 지식인의 청절과 지조를 끝까지 지켜내고 간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은 졸시 한편으로 그 분의 정년퇴임을 축하하고 싶다.
 
떨어져 오랜 낙엽처럼
바싹 메말라가는 대학교정에서
불현 듯 흐르는 실개천 소리를 듣고 있다
현란한 현수막 밑을 오가며
실처럼 흔들리던 현기증을,
실없는 책상 모서리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던 울화통을,
끝까지 견디자며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물 조금 글썽 글썽이더니
기어이 맑은 물로 교정을 빠져나가는
김 교수의 정신사를 읽고 있다
여태 남아있는 새울음과 섞이어
죽음과 소녀의 음악소리로 잠시 멈추더니
그냥 또 흘러간다.
퇴근 길에 바라보던 먼 바다 보며
뉘엿 뉘엿 저무는 노을 빛따라
물결인 듯 바람인 듯 황혼의 새 한 마리
청춘을 묻어놓고 가볍게 날아간다.
말없이 훌쩍 날아가신다.
릴케를 닮아가던 이별의 시 그대로,
만났으니 떠난다고 만나면서 우리는
이별이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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