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중국 북경에는 유명한 학자로 알려진 왕의영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불행히도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한약방에 사람을 보내 당시 감기에 효험이 있다는 ‘용골’이라는 기묘한 약을 지어오라고 시켰다. 왕의영은 그 약을 한포씩 살펴보던 도중 우연히 용골에 미지의 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음을 알았다. 이후 친구 유철운과 함께 감정을 해본 결과 그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고대 문자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약방을 뒤지기 시작했고 문자가 비교적 뚜렷한 용골을 사들였다. 수년 동안 약 5천 조각을 수집했다.


▣ 갑골문자(甲骨文字)의 명칭
1903년 왕의영과 유철운이 모은 문자는 ‘철운장구’라는 책으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이를 시작으로 여러 학자는 용골에 새겨진 문자의 의미를 읽고 이해하기 위한 연구에 동참했다.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용골이 거북이의 등껍질과 소 같은 짐승의 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갑(거북이 껍질)’ ‘골(짐승들의 뼈)’의 의미로 ‘갑골문자’라 부르게 되었다.

▣ 갑골문자의 내용과 기능
왜 중국 고대인들은 딱딱한 동물의 뼈에 조각칼을 써서 무리하게 새겨 놓았을까. 여기에는 종교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거북이는 중국 고대부터 용, 봉황새, 기린과 더불어 영험스런 동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제물로 바쳐 글을 새긴 것이다. 또한 은나라는 미신을 믿는 사회였기 때문에 하늘의 신에게 뜻을 묻고 이를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갑골문자를 사용했다.
기록된 내용은 왕조의 제사ㆍ농사ㆍ기후 등을 비롯해 외적의 침입과 정벌, 왕의 여행, 사냥ㆍ질병 등의 전반적인 생활이 담겨져 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갑골문자를 새긴 것은 단순히 말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글을 새긴 이도 종교적 지도자이거나 특정 전문 기술자가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갑골문자를 30년이나 연구했다는 양동숙(숙명여대 제2외국어 문학부) 교수는 “갑골문자는 은나라의 왕이 행했던 생활과 관습이 상세하게 담겨져 있는 것”이라며, “고대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은나라 시절의 왕들은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드는 등 나라에 큰일이 났을 때 갑골문을 불에 태워 불탄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 갑골문자 사용당시의 시대적 상황
왕도는 갑골문에서 대읍이라고 쓰였는데 지배귀족들의 주거지인 씨족읍이 대읍을 둘러싸며 많이 형성됐다. 이 씨족읍에는 많은 소읍이 예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읍들 상호간의 누층적 지배예속관계가 국가구조의 기본이었던 것으로 보아, 왕도에는 이미 어느 정도의 지배관료층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수수, 조, 보리 등을 재배하고 소, 말, 염소, 돼지 등을 사육했으며 누에도 쳤다. 생산을 위해 노예를 사용했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말이 많다. 하지만 이민족이 제사용 제물로 희생되고 왕의 묘 주변에 엄청난 순장인골이 출토되었다는 점을 볼 때 노예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문화적으로는 중국 청동기문화의 전성기였다.

▣ 갑골 문자의 역사적 가치
갑골 문자는 3천년 전 이상의 시대에 2백5십년 동안이나 쓰였으나 은 왕조가 망하면서 지하로 매몰돼 버렸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갑골문자는 발견 뒤 몇 십년의 연구 성과로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인명이나, 지명 등의 고유명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해독되었다. (현재 15만~16만 편수가 수집됐으며, 5천여자중에 1천 5백자가 해독됐다.)
이에 양동숙 교수는 “세계 고대 문자 해독의 역사에서 볼 때 경이로운 성과라고 볼 수 있다”며, “갑골문자가 짧은 시간에 해독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자가 수 천년의 긴 세월동안 끊임없이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글자와 언어 체계에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고대 역사에서는 하(夏)ㆍ은(殷)ㆍ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했다고 전해지나 하 왕조는 고전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있다. 이에 반해 은 왕조(BC 1600~BC 1046, 수도 이름을 따서 상(商) 왕조라고도 함)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당시 문화세계였던 화북지역에 군림했던 실제 왕조임이 판명됐다. 갑골문자가 전설로만 여겨지던 은 왕조를 역사로 끌어낸 것이다.
그리고 고대 중국의 사회, 문화, 정치 등을 소개하는 자료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결국 갑골문자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형성의 기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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