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산(국어교육과 명예교수)

 학보사 기자가 전화로 정년퇴임 소감을 물었을 때, 25년 전 면접 보던 때의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그때, 총장님은 왜 우리 대학에 지망했느냐고 물으셨고, 나는 어디에서 근무하든 할 나름이라면서, 뽑아주신다면 제주도를 소재로 삼아 좋은 시를 쓰고, 벤트빌트 대학의 랜섬(J. C. Ransom) 교수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벤트빌트 대학은 미국 남부 내쉬빌에 있는, 우리 대학보다 조금 큰 대학입니다. 그리고 랜섬 교수는 제자들과 ‘도망자’라는 동인회를 만들고, 신비평 이론을 창안하여 1980년대 중반까지 대학 강단을 지배해온 사람입니다.

 이런 풍경을 떠올리면서, 다른 사람이 인정하던 말던 그 동안 나는 면접 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주도를 소재로 삼아 네 권의 시집을 냈고, 연구실을 드나드는 제자들을 모아 ‘다층’이라는 동인회를 만들었고, 그들을 지도하기 위해 다섯 권의 이론서를 펴내면서 3, 40명을 문단에 배출했고, 전국적인 발표 무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계간 문예지 ‘다층’을 창간했으니 말입니다. 지금 내가 허덕거리는 한국디지털종합도서관(www.kll.co.kr)도 이들을 위해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약속을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직 내 꿈은 다 이뤄지지 않았고, 그렇게 열망했던 것들을 가로막은 장애물들을 밝혀 함께 제거하려고 노력한다면, 남은 교수님들과 학생들의 각기 다른 꿈이 모두 이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우선 외부에 대해 마음을 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부임해서 원로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연구실로 찾아갔더니, 자리에 앉아 ‘윤교수는 언제 갈 거요?’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분에 대한 오기 때문에 다른 대학에서 손짓을 해도 여기서 정년을 마쳤지만, 상당수의 교수들은 그렇게 떠났고, 꼭 모셔와야 할 분들도 망설이게 만들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통섭과 융합’의 시대입니다. 마음을 닫으면 개인은 물론 대학도 제주도를 둘러싸고 있는 해안선 안에 갇히고 맙니다. 너와 나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객관적인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가리고, 타자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못해 거꾸로 외부의 식민지가 됩니다.

 물론 무조건 외부의 물결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요. 그랬다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할 테니까요. 그러나 사회는 생태사회학적 법칙에 의해 운영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떠돌이 늑대가 정착하려면 토박이 늑대보다 세 배 이상 더 강해야 하고, 그래도 번식률은 사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법칙 말입니다.

 둘째로, ‘변방 의식’을 버리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관점을 바꾸면 바다는 단절의 공간이 아니라 세계로 연결할 수 있는 열린 공간입니다.
 예전에는 서울로 올라가지 않으면 정보를 얻을 수 없었지만, 지금에는 인터넷을 이용해 전 세계의 DB를 뒤질 수 있고, 시간만 뺏는 자리는 바다를 핑계 대며 피할 수 있고, 꼭 참석해야 할 자리는 서울의 강남에서 강북을 가는 시범 택시비 정도면 참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아니, 10분만 차를 몰면 하이얀 넝쿨꽃들이 그네를 타는 원시림이 나타나고, 서부 영화도 찍을 만한 초원과 멀리 남태평양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육지 사람인 내가 퇴임을 하고도 여기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 하려는 것은 제주보다 더 좋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서로 돕고 아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닫힌 사회는 겉으로 보면 상부상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닭장 속처럼 ‘찍기 순서(pick oder)’의 경쟁이 치열하기 마련입니다. 그 순위에 따라 생존의 조건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구촌 시대입니다. 그리고 제주도의 인구는 한국 전체의 백분에 일입니다. 그러므로 닭장 안의 순위만 염두에 두었다가는 보이지 않는 경쟁자에 먹히고 말기 때문에 같은 운명에 처한 사람들끼리 협조해서 공동순위를 높이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사랑해요, 여러분.
 꿈 속에서도 여러분들의 꿈이 이뤄지길 간곡히 빌겠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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