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석 미술학부 조소전공 교수

언젠가 TV에서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Yann Arthus-Bertrand, 1946∼)이라는 프랑스 항공사진작가에 대해 방영하는 것을 볼 기회가 있었다. 방송 내용은 150여 개국을 돌며 지구의 모습을 기록해온 얀이 독도와 경주, 남해안 일대 등을 촬영하여 ‘하늘에서 본 한국’ 프로젝트를 완성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열기구를 타고 공중에서 촬영한 지구의 모습을 보면 그 경이로운 장면에 할 말을 잃게 된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는 우리가 늘 알고 있던 장소도 전혀 다른 낯선 모습으로 다가와 장관을 이룬다.

얀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사진을 통해 어떤 사물이나 세계의 모습은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얀은 한국 촬영을 마치면서 “한국의 모습을 보면 편리한 수준까지는 온 것 같은데, 삶의 미적 가치까지 추구하는 수준은 아닌 것 같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이 말이 인상적인 이유는 한국사회의 현재를 매우 상징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얀이 말한 그 편리한 사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아직도 어딘가 불만족스럽다. 그 흔한 구호에서 반복되는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한 너무나도 많은 수치와 통계조건들은 차치하고, 그가 말하는 또 다른 조건, ‘삶의 미적 가치 추구’를 위한 수준이란 어떤 것일까?

압축 성장으로 무한 경쟁의 딜레마에 빠진 한국 사회에서 최근 개인의 삶의 가치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사회적 담론으로 공론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사회의 관심이 물질적인 풍요에서 인간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어떻게 추구하느냐는 방법적 문제에 대한 고민에 봉착하게 되었고, 그 대안으로 정신적으로 고양된 삶의 추구에 도움을 주는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주변에서 늘어난 문화예술 관련시설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사회의 삶의 질적 추구 지수는 가파른 오름세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기반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또한, 그 내용보다는 시설의 개수와 통계라는 양적 기준에만 급급 하는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문화를 계량적으로만 평가한다면 또 다른 양적성장식의 조악한 개발의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화예술이 우리 삶의 격조를 높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질적 가치의 기반 위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초가 튼튼한 진정한 문화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생적인 문화예술의 순환구조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여기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교육시스템이다. 현재 한국에서 교육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력을 키워나가는 것에만 편중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심리적이고 감성적인 정서함양 또한, 당연히 중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서는 논리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는 공감능력과 정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뇌는 논리적인 좌뇌 만이 아니라 감성적인 우뇌와 함께 ‘두 개의 뇌’로 구성되어 있다. 감성과 이성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감성과 이성이 균형을 이루며 계발될 때 인간은 조화롭고 균형적인 인격을 갖추게 된다.

특히 창조적 콘텐츠가 국가경쟁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문화예술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 예술교육은 일상적인 삶에서도 문화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제고시킬 대안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제주대에서 오랜 기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여러 단과대학으로 나뉘어 있었던 예술관련 학과들이 비로소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묶여 보다 전문적인 예술교육에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