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영표 사회학과 교수

이 세상에 난 사람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고 나이 들어감이다. 10년 전, 20년 전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연륜을 ‘삶의 지혜’라고 뿌듯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이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한 발자국 물러나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통찰력은 젊은 시절에 가졌던 비판정신과 뜨거운 감성의 상실을 대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흔히 삶의 연륜은 이러한 비판정신과 감성의 ‘포기’를 정당화하는 자기합리화 논리인지도 모르겠다. 부조리한 것으로 공격했던 체계(system) 안으로 들어가면서 ‘부조리함’의 인식과 비판이 아직 연륜이 부족했던 젊은 날의 치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올챙이 적을 기억하지 못하는 개구리는 아닐까?
 
어렸을 적 느꼈던 부모님은 권위주의적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 들어 아이를 갖게 되면 모두가 그때의 부모님처럼 행동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도 권력인지도 모르겠다.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모든 권력은 달콤하다. 그래서 그 권력 때문에 고통받던 시절을 보상하기 위해 권력의 부조리함을 쉽게 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부 졸업 후 잠깐 떠나 있었던 2∼3년을 제외하면 대학과 맺은 인연이 20년이다. 그동안 학생, 비정규직 교수, 그리고 이제 정규직 교수까지 다양한 위치를 경험했다. 물론 20년 중 대부분을 학생 신분으로 지냈다. 학부, 석사, 박사를 거친 시간이 14년이 넘는다. 돌이켜 생각해 본다.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분명 20대 초반 가졌던 뜨거운 가슴이 남아 있지는 않다. 불의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던 그 시절의 ‘용기’를 가지기엔 너무 나이 들어 버린 것이다.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을 쓸 때, 도서관을 오르내리고 자료를 찾아 헤매면서 느꼈던 묘한 희열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이제 글을 읽고 논문을 쓰는 것이 스스로의 창의적 행위이기보다는 직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과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시간강사 시절의 고단함이 나의 이름이 새겨진 연구실 문 뒤의 안락함 속에 사라져 간다.
 
나이 들어감을, 지위와 위치가 변하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20대 청년의 눈에는 부조리인 것이 삶을 지탱하고 공존하는 지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종종 망각하는 것은 연륜과 지혜라고 기성세대가 정당화하는 그것이 젊은 시절의 비판, 도전, 열정이 없이는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올챙이 적을 기억하지 못하는 개구리인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20대의 젊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펙을 쌓고 스스로를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밤잠을 설치는 것이 아닌 체제에 대한 저항과 비판정신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기성세대의 잘못은 자신들이 충분히 향유했던, 당연히 누려야만 하는 젊은 시절의 비판과 저항의 공간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기는커녕 이미 낡아버린 자신들의 기준으로 비판과 저항정신의 ‘거세’를 강요한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말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학 교과서는 사회학의 기본정신을 ‘비판’이라고 말한다. 사회문제를 분석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길을 제시하는 학문의 성격상 비판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만이 비판적인 학문은 아닐 것이다. 대학 전체가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들이 소통되고 토론되는 열린 공간이어야 하고, 토론과 소통을 통해 생산되는 지식은 현실을 정당화하기보다는 비판해야 한다.
 
우리의 대학은 어떤 모습일까? 대학이라는 체제 안에 가장 안정된 지위를 갖게 된 지금 나는 사회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까? 거창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스스로가 너무 왜소하고 나약하다. 그래서 이렇게 결심해 본다. 최소한 올챙이 적을 기억하는 개구리가 되자고. 20대에 누렸던 비판과 저항의 자유를 학생들에게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최소한 미안해할 줄 아는 선생님이 되자고. 하지만 이것도 버겁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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