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와 문화 다양성

▲ 정지영 영화감독

제주대학교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ㆍ제주의소리와 함께 학생들에게 국제화 시민의식을 고취시키고 미래지향적 마인드를 키워주기 위해 대학생 아카데미를 마련했습니다. 국내의 명강사를 초청해 매주 화요일 오후 국제교류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대학생 아카데미는 오는 6월 5일까지 총 13개 강좌가 열립니다. 학생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배우는 것처럼 영상도 읽어야 한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영상을 접한다. 기상과 동시에 TV를 틀어놓을 정도다. 뉴스를 떠올리면 아나운서가 같은 멘트를 해도 어떠한 화면을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시청자가 받아들이는 효과가 다르다.  전 세계 영화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영상을 읽는 눈을 키워야 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 공식은 이렇다. 만약 액션 영화가 히트를 쳤다면, 그것이 왜 관객의 사랑을 받았는지 분석해서 샘플을 만든다. 다른 액션 영화를 만들 때 인물이나 전개 과정을 조금 바꾼 채 이 샘플을 그대로 적용한다. 이처럼 공식이 있는 장르 영화는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해 낸다. 그래도 사람들은 미국 영화를 찾는다. 바로 익숙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관객 수준이 한국 영화의 질을 결정한다. 극장은 수익을 목표로 한다. 검증되어 수입된 할리우드 영화들을 더 많이 극장에 걸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한국영화 제작이 위축된다. 한국 영화계에서는 외국 영화에 대적할 큰 영화 중심으로 돈을 투자하는가 하면, 투자자를 찾지 못한 저예산 영화들로 나눠지는 양극화도 심해졌다. 하지만 스크린쿼터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90년대와 달리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를 제치고 50%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나타난다. 일본이나 프랑스도 30%를 겨우 넘는다. 결국 관객의 수준이 한국 영화의 수준을 높여준 것이다. 영상을 읽어내는 방법은 사실 일주일만 공부하면 된다. 배워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반복하며 보는 것이 곧 공부다. 영화는 자꾸 볼수록 잘 읽힌다.
 
장르 영화를 본떠 대중을 즐겁게 하면서도 감독의 개성을 잘 살린 영화가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부러진 화살’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한 영화이면서 생소한 법정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리듬을 잘 보면 장르영화의 성격이 반영됐다. 사실 처음 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까지도 망하지 않기만을 빌었다. 실로 오랜만에, 턱없이 부족한 제작비로 천신만고 끝에 찍은 영화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기 위해 350만 명이 극장을 찾아줬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날린 직설의 ‘화살’이 적중한 셈이다.
 
모든 영화는 그 안에 만든 사람의 이데올로기가 들어가 있다. 굳이 가르자면 나는 영화인 가운데서 진보적인 성향을 띠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진보 영화가 아니라 잃어버린 보수의 가치를 찾아가는 영화다. 주인공 김명호 교수는 원칙주의자다. 사회가 합의한 것을 지켜 나가는 게 보수라면 김 교수야 말로 가장 보수적인 인물이다. 합의했지만 이런 부분은 고쳐야 한다고 따지는 게 진보다. 김 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법대로 해 달라고, 그것도 법으로 먹고사는 판사들에게 법대로 해 달라고 요구하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사법부가 보수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나만의 시각으로 그리려고 한 것이지, 누구 편을 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건 자기도 모르게 영화 속 인물에 감정이입이 된 사람들이 하는 얘기일 뿐이다. 나는 영화를 통해 부당한 권력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주눅 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용기라도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만든 사람의 세계관, 무의식이 반영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감독의 의도가 읽히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사법부에 있는 사람들은 내 영화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대부분 사실 그대로를 살렸을 뿐이다. 약간의 영화적 각색이 들어갔지만 90% 공판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교도소를 찾아 김 교수와 면회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김 교수는 석궁으로 판사를 위협하기는 했지만 쏘지는 않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어찌 됐건 사법부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재생산했다. 사법부에서는 흥행을 위한 예술적 허구라고 말하더라. 언론에서도 내 영화를 가리켜 진실과 허위의 문제, 영화와 허구의 문제로 많이 떠들었지만 내용은 자신 있게 책임질 수 있다. 이 영화는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희생시켜 그들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게 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나는 영화를 통해 현실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논란으로 이어져 파급력을 지니길 바랐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한 개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에 분노해야 한다. 아직 눈에 띄는 효과가 없는 게 아쉽지만 사회 변화의 작은 밑거름은 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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