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황산벌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황산벌’이 걸죽한 사투리로 관객들의 웃음보를 터트렸다. 이 영화에서는 김유신과 계백의 대결구도를 중심으로 나왔지만 우리는 또 다른 역사적인 인물 ‘반굴’과 ‘관창’을 만날 수 있다.
‘반굴’과 ‘관창’은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차례로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관창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 중 ‘황산벌에 계백 맞선 싸운 관창’이라는 노래 가사가 있듯이 우리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
또한 황산벌에서 계백과 맞선 싸운 사람이 김유신이 아니라 관창으로 되어있는 것처럼 관창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왜 반굴은 후세 까지 이름을 떨치지 못했을까. 오히려 적진에 먼저 뛰어든 반굴의 용기는 관창보다 더 유명세를 타야하는데 말이다.
첫번째 이유로는 반굴보다 관창이 더 어렸기 때문이다.
관창은 645년에 태어나 황산벌 전투 당시 꽃다운 16살이었다. 이에 반해 반굴의 출생연도는 나와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9남매 중 넷째였으며 김유신의 동생이자 그의 아버지였던 장군 ‘흠순’이 황산벌의 전투 당시 환갑이 지난 나이였다. 또한 그는 이미 ‘김영운’이라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관창보다는 나이가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명으로 먼저 적진에 뛰어든 반굴은 적과 힘껏(?) 싸우다 전사했지만 신라군의 사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약발이 안 선 것이다. 그래서 반굴보다 어린 관창을 적진에 보내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영화에서 나왔듯이 반굴은 계백과 대면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를 찾아보더라도 반굴의 최후는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라고만 기록돼 있다. 그가 계백과 대면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와 반대로 관창에 대한 역사서를 찾아보면 계백과의 대면한 일화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아버지인 좌장군 ‘품일’의 명으로 적진에 뛰어든 관창은 적에게 사로잡혀 계백과 대면하게 된다.
계백은 투구를 벗은 관창을 보자 너무 어리고 그의 용감함을 높이 사 다시 되돌려보낸다.
하지만 관창은 “아까 내가 적진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그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러운 바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뛰어든다. 이에 계백은 그의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낸다.
아버지 품일은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해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신라군은 이를 보고 분에 복받쳐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 지르며 진격해 백제를 멸하게 했다. 이 일화는 ‘삼국사기’를 비롯해 계백의 위인전에서도 기록돼 있다.
이렇듯이 반굴은 먼저 적진에 뛰어들기는 했으나 영화에서 나왔듯이 계백과 대면 한번 못해보고 죽었기 때문에 그 위상은 관창의 기개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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