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스트라다무스'의 한 장면
노스트라다무스. 고등학교 시절, 그의 이름이 들어간 학습지를 풀어봤던 학우도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유명한 예언자로 기억되고 있다. 인류의 종말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는 1503년 12월 14일 프랑스 남부 생 레미의 유대계 집안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집을 떠나 아비뇽에서 철학과 어학을 공부했다. 1522년 프랑스의 명문 몽펠리에 의학교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의사’로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인간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그 당시 창궐하던 페스트를 퇴치하면서였다. 페스트는 쥐벼룩이 사람에게 페스트균을 옮김에 따라 발병하여 감염자의 기침 등을 통해서 전염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병원균이 전염병을 일으킨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위생이나 소독의 중요성이 간과되었다. 이로 인해 페스트가 한 마을에 발생하면 급속도로 전파되었으며, 그 마을 사람들은 오한, 고열, 현기증 등의 증상을 보이다가 검게 얼굴이 변하면서 죽어갔다. 이 때문에 페스트는 걸리면 얼굴이 검게되어 죽는다고 해서 흑사병이라고도 불렀다. 그나마 겨우 살아남은 병원균을 가진 보균자들이 이웃 마을로 도망쳐 페스트를 전염시켰다.

그렇게 중세의 마을 사이에 악순환이 계속 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정통 치료법은 나쁜 피를 뽑아내는 ‘사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스트라다무스는 기존의 통설을 뒤엎고 새로운 방법으로 페스트에 맞서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깨끗한 물을 마실 것을 주장하며, 독한 포도주로 집을 닦아내고 온 마을의 쥐, 페스트에 걸려 죽은 사람의 시체, 그들이 입던 옷과 그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모두 불태웠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신의 재앙’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지만 그 마을에는 이후 페스트가 사라졌다. 이후 그는 남부 프랑스를 돌아다니며 그 당시에는 ‘기적’과도 같은 치료법의 사용으로 페스트를 퇴치해서 프랑스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페스트는 3 세기나 지난 후, 그가 예언서에서도 언급했던 파스퇴르가 19세기말에 페스트균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졌다.

또한 그는 죽은 여자의 양 뺨에 생긴 반점을 보고 그 여자가 자연사로 죽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을 밝혀내 범인을 잡기도 하였다. 즉 바닥이 닿는 몸 부위에 반점이 생긴다는 사실에 착안해 여자가 죽은 뒤에 시체를 옮긴 것을 알아냈다. 법의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법의학을 사건 해결에 이용한 시초로 평가하고 있다.

이후 어린 시절부터 계속 연구해오던 점성술에 두각을 나타내며 의사로서보다는 예언가로 더욱 명성을 떨쳤던 노스트라다무스는 1564년 프랑스의 샤를 9세의 왕립 내과의사로 임명됐다.

임종 하루 전날 ‘내일 뵙겠습니다.’라는 제자들의 하직 인사에 대해 ‘해가 떠도 나는 깨지 않을 걸세’라는 마지막 예언을 남기고 1566년 7월 1일 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그가 미래에 치료할 방법을 보고 페스트를 퇴치했는지 기나긴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경험으로 페스트를 물리쳤는지는 노스트라다무스 그 자신만 알 것이다. 하지만 노스트라다무스에 대한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당시 공포의 대상이던 페스트에 대항해 싸우던 진정한 ‘의사’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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