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문화콘텐츠, 매계 이한우(李漢雨)의 영주십경(瀛洲十景)

▲ 김치완(철학과 교수)
조선후기 제주사람 이한우의 고향인식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는 제주를 말할 때마다 늘 ‘영주십경’이 손꼽힌다. 그런데 탐라(耽羅)나 제주(濟州) 대신 영주(瀛洲)라는 말을 쓰는 것도 낯설지만, 중국산수화의 화제인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비롯된 관동팔경이나 단양팔경과는 달리 십경을 말하는 것도 낯설다. 물론 이 낯설음은 이즈음에 우리가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고, 불교의 대표적 공간인식 방식의 하나가 시방세계(十方世界)라는 점을 알면 어느 정도 해소된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날 영주십경을 말할 때는 언제나 조선후기 제주사람이었던 매계 이한우(1823~1881)의 ‘영주십경시’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승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비롯한 도내외의 인사들과 교류가 많아서 그의 시가 널리 알려진 탓도 있겠지만, 자신의 고향 제주를 영주(瀛洲), 곧 이상향으로 재창조했다는 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짧은 글에서는 조선후기 제주사람인 이한우의 고향인식을 ‘낯설음’이라고 하는 소재로 살펴보고자 한다.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 1861~1936)이 썼다는 ‘매계선생행장(梅溪先生行狀)’에 따르면, 이한우의 입도조는 전주 이씨 계성군파의 이팽형(李彭馨)이다. 그런데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자료와 ‘선조실록’의 기사를 비교해보면, 이팽형은 그의 아버지인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보다 열 살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개인이나 집안, 그리고 국조(國祖)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에는 신비화 또는 장엄화라고 하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적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혼란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한우 개인의 삶도 과거시험 때문에 여덟 번이나 바다를 건너 상경했다는 것이나 유배와 있던 추사 김정희와의 교유는 물론, 제주목사로 왔던 가은(嘉隱) 목인배(睦仁培, 1794~?)와의 교유 등 외지인들과 활발한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 등으로 보건대, 온전히 제주사람으로서의 시선을 고집한 인물로 보기 어렵다. 이즈음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이한우는 분명히 신촌(新村) 출신의 제주사람이지만 당시 제주에 있던 외지인들과의 교유를 통해서 고향 제주에 대한 타자의 시선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추론은 그가 고향 신촌 마을에 대해서 쓴 ‘학도계좌목서(學徒契座目序)’와 유배와 있던 추사를 그리며 지은 ‘근제금추사선생수성초당(謹題金秋史先生壽星草堂)’의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이 글들에서 고향 마을을 ‘구석진 포구’, ‘마을의 풍속이 어두워져서 오래도록 그 거칠음을 깨뜨리지 못하였다’, ‘멀리 남쪽 바다 한 채 초가를 지어’라는 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제주에 온 타자(他者)의 눈길에 공감하고, 그러한 관점으로 제주를 재진술하는 ‘경계인으로서의 시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 영주십경은 사봉낙조, 산포조어, 영구춘화, 녹담만설, 영실기암, 고수목마, 귤림추색, 산방굴사, 정방하폭, 성산일출을 일컫는다.

원행(遠行): 낯선 공간의 체험
지금도 외지인들에게 제주는 경관 자체가 낯설기 때문에 곧잘 실제보다 과장되게 평가된다. 하지만 제주사람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환경에 대해 실제 이상으로 낯설게 표현하는 외지인들이 낯설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은 외지인들이 낯설어하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공감을 표현하거나, 못들은 척하면서 그 낯설음을 해소하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외지인들에게 제주는 낯설고, 제주사람들에게 그것을 낯설어하는 외지인들이 낯설다. 그러다보니 제주사람들이 외지인들의 눈으로 제주를 볼 때 제주는 이중으로 낯선 공간(hyper reality)이 되어 버린다.
 
이한우의 시에는 외지인들을 현실적인 인물로, 제주와 제주인들을 비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가 여덟 번씩이나 바다를 건너 과거를 본 이유를 설명하면서, ‘나라의 법도에 과거가 아니고서는 선비가 나아갈 길이 없다(國規非科擧 士無進路)’라고 해서 자신을 제주사람이면서 동시에 선비(士)로 인식하고 있는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그의 원행(遠行)은 말 그대로 공간으로는 천리 밖의 본래 고향, 시간으로는 19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hyper) 것으로 실현된다. 하지만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한우는 오히려 제주사람일 수밖에 없는 나그네로서의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이한우는 서울과 제주에서 모두 경계인의 관점에서 선경(仙境), 곧 비현실적 공간을 노래하는 시인이 된다. 서울에서 쓴 시들에서 그의 의식이 ‘제주에서 서울, 서울에서 제주’라는 공간이 이중적으로 분리 교차되고 있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한우의 ‘멀리 감’과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자조(自嘲)의 감정은 일종의 실존적 불안(Angst), 또는 이중적 분리에 따른 난파(Scheitern)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본(反本): 낯선 공간의 창조

매계 이한우의 시는 ‘만사(輓詞)’와 ‘영주십경(瀛洲十景)’을 제외하면 총 94편 99수인데, 이 가운데서 외지에서 지은 시로 보이는 총 27편 가운데 세 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나그네의 회포와 고향을 그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시들에서 그리는 고향은 그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된 고향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고향은 ‘자신의 좌절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의 공간이며 자신의 상황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며 그리움의 공간’으로서, 실존적 불안과 난파의 경험을 해소할 수 있는 가상적 공간이다.
 
그런데 이 가상적 공간에서 그는 일상의 재발견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현실을 노래한다. 곧 그의 시 ‘요지(樂志)’에는 ‘집 동쪽엔 연못 남쪽엔 우영팟, 나날의 삶은 그저 밭 갈고 고지 잡을 뿐, 부모 모셔 오래 살아 즐거움 끝없으니, 남은 힘 모아 시경 서경을 읽노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에서도 평범한 일상과 군자로서의 직분을 실천하는(餘力讀詩書) 선비의 일상이 대비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대비구도는 영주십경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선 지명부터 본다면 ‘산과 봉우리(山峯)-언덕과 건물(邱房)-숲과 연목(林潭)-집과 방(室房)-포구와 수풀(浦藪)’이 대비되는데, 여기에서는 높고 낮음, 부분과 전체, 안팎이 전통적인 음양대대적(陰陽待對的) 관점에서 중층적ㆍ공감각적으로 제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 형상에 있어서도 ‘뜨는 해와 지는 햇빛(出日落照)-봄꽃, 여름폭포, 가을빛, 늦은 눈(春花夏瀑秋色晩雪)-기이한 바위와 굴 속의 절(奇巖窟寺)-고기 낚음과 말을 풀어먹임(釣魚牧馬)’이 시간과 동정(動靜), 은현(隱現), 속방(束放)이라는 중층적 구도로 대비되고 있다.

새롭게 창조되는 제주
이한우는 제주의 자연을 육지와 동떨어진 정적인 섬으로 그리는 대신, 그것들에 안정(安靜)되면서도 약동(躍動)하는 공간적 이미지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면서도 항구일관(恒久一貫)하는 시간적 이미지를 불어 넣어 새로운 시공간으로 재창조하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익숙한 자아의 관점에 머물지 않고, 타자의 시선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진취성이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탈중심성은 이중적이다. 타자의 시선을 무시한 채 ‘이것이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제주다움이다’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제시하면 그런 것들은 오래 가지 못할뿐더러 제주도 내에서만 통용되는 슬로건에 그칠 우려가 높다.
 
반대로 제주의 지정학적 위치와 자연경관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우리는 제주를 이렇게 소비하겠다’고 나서면 제주의 자기 중심성은 파괴되고 만다. 따라서 제주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고, 보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안팎으로 열어젖힐 수 있는 계기와 실제적인 만남의 장(場)을 통해 끊임없이 모색되고 수정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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