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동자 영상보고서 『밥·꽃·양』을 열기 전에...
제주여민회와 우리대학 총여학생회는 지난 22일과 23일 양일간 법정대 중강대에서 『밥·꽃·양』을 4차례에 걸쳐 상영했다. 매 상영이 끝난 후에는 임인애 감독과 관객들이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도 조촐하게 마련됐다.
이 영화가 관객들과 만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의 투쟁을 필요로 했다. 많은 이들이 떠들어대는 평화적 해결과 공정한 룰은 영화 안에서도, 영화 밖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이 사회는 아줌마들과 임감독이 끊임없이 던져대는 ‘왜?'냐는 물음에 또박또박 대답해 줄만큼 정의롭지 못하다.

우리는 하루 세 끼 밥을 먹는다. 먹는다는 것(食)은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 데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요건이다. 따라서 배고픔은 최소한의 요건마저도 결핍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루 세 끼 찾아먹는 밥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식탁에 밥이 오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벼를 생산해야 하고, 그것을 쌀로 가공해야 하며, 그 쌀을 먹음직스러운 음식으로 조리해야 한다. 그러나 제 시간에 입에 넣을 수 있는 밥이 눈 앞에 있으면 그만인 것이 간사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속성이다. 식사 시간이 되기 무섭게 식당을 향해 내달리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저 긴 행렬들.
이 영화는 지난 98년 울산 현대자동차 노조 총파업이 ‘노사 2백77명 정리해고안 합의'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감춰지고 묻혀졌던 식당 아줌마들의 이야기이다.
공장 노동자들의 밥을 짓는 그녀들은 매일 수십 개의 큼지막한 무를 습관처럼 썰고, 국이 가득 담긴 큰 솥을 예사롭지 않게 끈다. 조리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김을 정면으로 맞댄 얼굴은 발갛게 상기된 채 땀에 젖는다. 때를 놓칠 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식사는 조리실 구석에서 서둘러 이뤄진다. 몇 안 되는 남은 반찬과 쪼그린 자세로 말이다.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와 그 곁 식당에서 밥을 짓는 여성 노동자. 마주하고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너무나 두터운 벽이 존재한다. 그들에게 그녀들은 임금은 받을대로 받으면서 성의 없는 밥이나 내놓는 식당 아줌마에 불과하다. 한 숟갈 더 넣어주면 돼지밥이라 하고, 그래서 한 숟갈을 덜어내면 개미밥이라 투덜댄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일터. 그러나 식당에서의 일과가 끝나도 그녀들은 쉴 수가 없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 가족들의 밥을 지어야 하고, 빨래를 해야 하고, 청소를 해야 한다. 그리고 밤이면 피곤에 찌든 몸일지라도 남편이 원하면 순순히 대주어야 한다. 그녀들은 노동자인 동시에 아내이고 어머니이며, 며느리이자 딸이기 때문이다.
파업이 진행되면서 그녀들은 사수대와 그 가족들을 위해 또다시 밥을 짓는다. 도시가스가 막히면 방앗간에서 쌀을 쪄 나르고, 노동조합의 돈을 아끼기 위해 시장에서 무 잎사귀와 배추 껍데기를 주어다가 국을 끓인다. 그러나 그녀들의 헌신적인 뒷받침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정리해고의 표적이 되고, 하청노동자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부여받는다. 소수자 집단 안에서도 가장 열악한 위치의 소수자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사 사정이 안정을 되찾은 뒤에도 노사는 그녀들을 외면한다. 이제 그녀들은 분노한다. 공장 내에 텐트를 치고 목이 터져라 투쟁을 부르짖으며 단식농성까지 전개한다. 그녀들의 몸은 하루하루 쇠약해지고, 분노와 좌절로 멍울이 맺힌 그녀들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매번 중재라는 이름으로 조직되는 무리들과 그들이 평화적 해결을 위해 만들었다는 타협안들은 그녀들이 왜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는다. 결국 그녀들의 텐트는 걷혀지고 영화는 계속된다,라는 말을 남기며 2시간 15분 가량의 기록에 마침표를 찍는다.
오늘도 그녀들은 밥을 짓는다. 밥을 짓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는 내내 가슴이 시큰거리게 아려오는 건 왜일까. 그녀들을 외면할 수 없는 건, 땀과 눈물에 젖은 그녀들의 얼굴 위에 내 어머니, 그리고 당신 어머니의 모습이 포개지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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