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치완(철학과 교수)
‘금의야행(錦衣夜行)’은 “비단 옷을 입고 밤에 다닌다.”라는 뜻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비단 옷을 입었으니 남이 알아줄 리가 없다. 그래서 아무리 잘 해도 남이 알아주지 못하는 헛수고, 허세를 가리킨다. 물론 아무 보람이 없는 행동을 자랑스럽게 하는 못난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지만 안데르센의 단편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에 비하면 금의야행은 나름 품격이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갖추어 입은 것을 보지 못하는 남의 잘못이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벌거벗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향우(項羽)도 결국은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 그래서 진나라를 멸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옥한 관중(關中)을 버리고, 결국은 제후들과 천하(天下)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항우를 속인 것은 ‘힘으로는 산을 뽑아내고 기운으로는 세상을 덮을 만하다(力拔山氣蓋世)’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벌거숭이 임금님인 항우에게 가장 멋지게 속아 넘어간 이도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관중을 도읍으로 삼으라는 진언(進言)에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아니하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리오?”라고 대답한 사람이 바로 항우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이 일을 두고 “자신의 공을 뽐내고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우며, 옛 가르침을 스승 삼지 않고 힘으로만 경영하려고 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한 세력기반, 곧 ‘집토끼’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이르러 함께 나누고 연합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항우는 제후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제후를 버렸고, 결과적으로 자신과 천하를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초나라를 그리워해서 관중을 버린 것(背關懷楚)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해서 자신을 버린 것이다.
 
노자는 ‘넋을 빼 놓고 있지 말라(載營魄抱一)’고 말한 일이 있다. 넋을 빼 놓고 있는 사람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늘 불안할뿐더러, 제 눈마저도 의심한다. 그런데 본디 도무지 어찌할 요량을 내지 못하는 위인이다 보니 그렇게 불안해하고, 의심하는 게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자신을 멋지게 속인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이렇게 자신을 속여서 확신범(確信犯)이 되고나면 대개는 주제넘게도 순교자가 되기로 마음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 위인의 심장 박동이 약간 빨라진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최대의 반전인 셈이다.
 
노자는 우리에게 금의야행의 품격을 일러준다. 첫째, 넋 놓고 있지 마라. 둘째, 갓난아이처럼 온 몸에 힘을 빼라. 셋째, 지레 겁을 집어 먹고 헛것을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라. 넷째,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우선 한 걸음 내딛어라. 다섯째, 한 걸음이 전부는 아니므로 늘 조심하라. 여섯째, 몇 걸음 떼었다고 해서 자만하지 마라. 노자가 굳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껏 그렇게 걸어왔다. 노자는 그렇게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지금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그 첫 걸음이 지금까지 우리를 걷게 하는 그 그윽한 힘(玄德)이라고 응원해주는 것이다.
 
금의야행의 품격은 ‘봐주는 그 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늘날 대학이 인적자원의 중요성과 구성원의 심리적 가치를 외면하고 성과에만 매달리게 되는 이유는 넋을 빼 놓고 있어서다. 모름지기 대학이 나아갈 길이란 “분명한 힘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사회 구성원의 수준을 끌어올리며, 각자가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하는 데(在明明德 在新民在止於至善)” 있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일수록 더욱 더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제주대학교가 금의야행의 품격을 제대로 갖춘 구성원들로 그득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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