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동성애자의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두 남성이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일으켰다.

  수년전만 하더라도 얘기를 꺼내는 조차 암암리에 금기시 됐던 ‘동성애’가 이제는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에게는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이렇듯 급변하는 사회로 인해 우리들의 인식도 변화되고 있으며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도 동성애가 존재했을까.

  신라시대 때 각 풍월주(화랑 우두머리)의 일대기를 그린 ‘화랑세기’를 보면 몇몇 화랑들의 ‘공전’을 통해 동성애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종공전을 보면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인물과 산수의 절묘함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호림이 사랑하여 부제로 삼았다.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아 스스로 여자가 되어 섬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했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만 보더라도 신라시대 때는 동성애가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기록에 언급된 최초의 동성애자는 신라 제36대왕인 혜공왕(758∼780)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는 여자같이 행동하고 옷 입기를 즐겼고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원래 왕은 여자였는데 남자의 몸을 빌어 왕이 됐으니 나라에 불길하다고 하여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오랜 세월 짓눌려 지내던 귀족세력의 반격 속에 희생된 것이다.

  고려의 제7대왕인 목종(980∼1009)은 역사서가 인정한 ‘동성애자’이다. 어린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친모인 헌애왕후가 그의 정부인 김치양과 부부연을 맺고 목종이 어리다는 이유로 그들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왕권을 상실한 목종은 의욕을 상실해 남색에 빠졌다.

  그의 동성연애의 대상은 ‘유행간’이라는 인물이다. 유행간은 용모가 남달리 아름다웠는데, 목종은 그의 용모에 반해 남색을 즐겼다고 한다. 또 유행간이 소개시켜준 ‘유충정’ 또한 목종의 사랑을 받아 유행간과 유충정이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목종은 선정왕후 유씨 이외에 다른 부인을 두지 않았으며 소생도 없었다.

   ‘고려사’에서는 목종을 ‘폐행을 가까이 하여 화를 입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후대의 사가들 또한 ‘술과 사냥을 좋아할 뿐, 정치를 돌보지 않은 무능한 왕’으로 혹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학자들은 목종의 정치적 무관심은 동성애적인 면이나 나태함이 아니라 친모의 강한 정권욕이 목종을 무기력한 왕으로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1330∼1374)은 친원세력 제거와 영토회복, 국권회복 등 개혁적인 정치를 펼쳤지만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모든 실권을 신돈에게 맡긴 채 딴 사람으로 변해갔다.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공민왕의 행적은 엽기적인 폭군의 행각과 다를 바 없다. 1372년 10월에 공민왕은 공신 및 고위 관직자의 자제인 ‘홍윤’, ‘한안’, ‘권진’ 등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을 선발, ‘자제위’라는 기관을 설치해 음란한 유희를 벌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년내내 궁에서 지내면서 휴가를 얻지 못해 공민왕을 원망했고 이후 이들로 인해 공민왕은 최후를 맞이한다.

   공민왕은 개혁 군주의 첫 이미지와 달리 그는 수치스러운 최후를 역사서에 기록하게 됐다. 하지만 ‘고려사’가 조선건국세력에 의해 40년간이나 수없이 고쳐진 역사서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기록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일부 사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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