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곤(철학과 교수)

최근에 영화 ‘노아’를 보았다. ‘노아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성서의 이야기이다. 영화를 본 뒤 느낀 것은 태초에나 현대에나 그 형식에 있어서 다를 뿐이지 인간이 살아가는 본질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태초에 일어났던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지구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구이편에서도 일어나고, 거대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또한 미세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영화의 내용이 성서의 내용과 다른 점은 ‘노아’ 역시도 의인은 아니었다는 설정이며, 따라서 신의 뜻은 ‘지구라는 낙원을 살리기 위해’ 노아의 가족을 마지막으로 인류가 멸종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도 끝장나는 이 역사적 드라마를 묵묵히 수행하고자 한다. 자신의 자녀들은 ‘성실하고 선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자신의 아내에게 노아는 ‘자신도 의인은 아니었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죄를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의 상황 중에 있기 때문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 철학자’의 사상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새로 탄생한 자신의 손녀를 죽이지 못하여 신의 뜻을 저버렸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노아를 통해서 성서적 의인의 모습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진정 ‘진리’때문이라면 ‘나 자신’과 ‘나 자신의 가족’마저도 희생할 수 있다는 ‘이기주의에 대한 극복’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기존의 헐리웃의 영화와는 사뭇 달랐다. 영화에서는 마지막 반전도 없지 않았다. ‘인류의 종말’이라는 이 대전제가 신의 뜻이 아니라, 사실은 노아의 ‘선택’ 즉 노아의 ‘자유의지’에 맡겨진 것임을 노아가 깨닫게 되고 ‘이번에는 인간들이 善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데서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결국 인간은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영화를 집중해서 본다면 영화 속에서 많은 가치 있는 메시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구는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 ‘낙원이란 모든 생명체가 번영하는 바로 이 지구라는 점’, ‘인간에게는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지켜야할 법칙이 있다는 것’, ‘인간은 결코 스스로 자신을 완전하게 알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의로운 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 ‘종말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근자에 들어 세간에 뉴스거리가 될 만한 큰 소식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김연아 선수의 ‘도둑맞은 금메달 사건’이나, 일본의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나,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사건’이나, 북한의 노골적인 ‘핵개발 선언과 미사일 발사사건’등 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공동의 善’을 결코 생각하지 않겠다는 이기주의의 발로이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지만, 인간이기에 이기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은 ‘거짓’이다.
 
인간은 본성을 넘어서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존재이며, 나아가 타자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은 출발부터 거짓말이 될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한 ‘선택’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어떠한 사회인가, 제주도는 어떠한 사회인가 하는 것에도 정답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사는 사회란 항상 진행형 중의 사회이며,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그것을 선택하는 다수의 구성원들의 ‘자유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실 낙원이란 태초에 만들어 진 곳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이며, 사회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조금씩 희생하고 공동의 善을 지향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바로 그 장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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