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정읍 모슬포 교회를 중심으로 -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예로부터 제주는 개방된 지역으로 고대부터 다양한 문물과 문화의 유입이 잦았으며, 교역의 중간 기착지로의 역할을 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원거리 무역이 가능해지고 그에 따라 제주는 중간 기착지로서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으며, 고립화되었다. 더욱이 조선시기 출륙금지령으로 인하여 상업적 목적이나 공인된 신분이 아니면 육지로 진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적 배경 속에 제주도는 개방된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사회문화적 성향은 그 전보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즉, 새로운 문화에 대한 수용 가능성이 전보다 위축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서구로부터 전해져 온 종교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력을 미쳐 배타적이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타 지역에 대한 배척이 심한 제주도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비해 토착화가 쉽지 않았다.
그에 비하여 대정지역, 특히 모슬포 지역의 경우에는 항구라는 위치적인 특성으로 상대적으로 외래문화에 대한 수용성이 높은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바라보면 조선시기 5좌수 의거, 이재수의 난, 1909년의 의병활동을 시작으로 식민시기 끊임없는 저항운동과 함께 계몽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왔으며, 소외되었던 여성운동의 선구자였던 고수선의 출신지로서, 지역의 개방성에 의한 개혁성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지역적 특징이 있다.
이러한 모슬포의 지역적 특색을 고려하여 본 연구에서는 제주도에서 한라산을 중심으로 남부지역인 산남지방 최초의 교회인 모슬포 교회가 지역의 개방성과 연결되어 토착화 되는 과정에서 지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연구하여 발표해보고자 한다.
 
2. 논의의 배경과 연구방법
 
1) 논의의 배경
 
본 장에서는 토착화의 개념과 기독교가 지역에 미치는 영향의 요인에 대한 부분을 선행연구로서 살펴보고, 연구 내용과 방법을 도출하고자 한다. 최병관(2002)에 따르면 기독교의 토착화는 선교 현지인의 입장에서 ‘복음’을 자신들의 전래문화에 수용해서 접합시키는 것을 뜻한다. 한편, 박봉배(1987)에 따르면 토착화란 종자와 토양의 관계처럼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종자에 의한 토양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바라본다. 즉, 종교의 토착화란 단순히 그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로서 그 지역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종교에 의한 지역사회의 변화, 지역사회에 의한 종교의 변화라는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종교와 지역사회의 유기적 변화와 사회 전체적인 다각적인 변화를 총체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토착화의 개념을 바탕으로 제주도를 대상으로 하여 지역사회에 개신교가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를 찾아보았으나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시기적으로 개신교의 토착화가 이루어진 한국전쟁 이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지역주민에 대한 교육 기회의 확대와 의료지원 등의 근대성, 민족주의 운동의 주도, 신실한 복음주의의 3가지 특징으로 토착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연구가 있었다. 한편, 동일 계통인 천주교의 경우에는 종교의 지역화에 대해서 그 요인으로 지역주민에의 편의시설 제공, 주민 교육에의 이바지, 구민활동 등의 지역복지에의 활동을 제시하였다. 즉, 종교의 토착화에 크게 기여한 부분 중 하나가 지역주민에 대한 교육기회 확대와 지역봉사활동, 사회복지사업에의 참여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지역의 개신교가 보여준 구호 및 사회사업이 고통과 위기에 처한 시민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생존을 유지시켜 줄 수 있었으며, 특히 대규모의 빈곤 속에서 사회복지의 개입 필요성이 증폭되었음에도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제도가 전무한 가운데 이루어진 활동은 다른 종교에 비해서 그 차별성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개신교가 모슬포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가지며, 그러한 영향이 토착화를 이룰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는지의 여부를 살펴보겠다.
한편 김인수(1994, 3~6.)는 3·1운동의 주체세력 중 한 부류가 개신교였다는 사실로 기독교는 결코 반민족적이지도, 몰민족적이지도 않은, 애국 애족의 항일적 종교이며, 기독교인들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이런 일을 주도했다고 본다. 이는 서양 종교인 개신교가 민족의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실례로 「모슬포교회 100년사」의 내용을 참조하여 보면 교회 초기 3·1운동에 가담하여 대정 지역주민과의 연계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임시정부의 독립군자금 모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만 원 정도의 모금액을 송금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즉, 개신교가 민족주의 운동의 한 흐름에 기여함으로써 지역 토착화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강인철(1994, 23~31.)에 따르면 국가가 개신교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과 공신력을 활용하고자 개신교 교회에 다양한 특혜를 제공했으며, 개신교 교회는 국가에 힘을 실어주었다. 개신교 교회는 해방정국과 더불어 친정권적 성향을 띠게 되고 당시의 남한의 정치엘리트층이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국가의 적을 ‘빨갱이’로 규정하게 되면서 개신교 교회의 이데올로기와 권력구조에서 민족주의적 요소가 약화되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즉, 개신교는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편승하여 민족주의적 성격을 잃고 그 자리에 반공 이데올로기적, 친 정권적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연구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개신교의 성격을 규명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일제 식민지시기에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면서 활발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이승만 정권 수립 이후 친정부적으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의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개신교=반공’이라는 인식의 확산으로 개신교는 친정부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한편, 그러한 흐름 속에서 사회 부조리와 모순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소수의 진보적인 개신교의 세력도 존재한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시대적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식민시기의 민족주의 성향과 해방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적 성향의 줄기가 모슬포 교회에 녹아들었는가의 여부와 그에 따라 지역사회와는 어떠한 관계성을 가지고 토착화의 전략이 진행되었는지를 중심적으로 바라보았다.
 
 
2) 연구대상과 방법
 
본 연구에서의 대상은 모슬포 지역에서 오랜 역사를 간직해온 ‘모슬포 교회’이다. 전체적으로는 모슬포 전체의 교회를 대상으로 하여 개신교의 지역적 영향성을 알아보아야 하지만 모슬포 교회가 그 지역적 대표성을 가지는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슬포 교회를 중점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 요건이란 첫째, 모슬포 교회가 가지는 역사성 때문이다. 모슬포 교회는 1909년 9월 1일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서 시작된 제주도 개신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회 중에 하나로 손 꼽히며, 당시 산남지방에 교회가 전무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모슬포 교회는 모슬포 사회 및 대정 사회 전반에 있어서 개신교의 성격과 지역적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는 고유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둘째, 신도의 비율의 이유 때문이다. 다음 표를 보면 모슬포 교회가 모슬포 교회의 개신교 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1>

 
 
 
 
 
교회 명
유치부, 아동부
중.고등부
성년
합계
모슬포교회
120
60
230
410
모슬포중앙교회
60
28
78
166
모슬포제일교회
20
15
80
115
모슬포성결교회
20
20
40
80
모슬포순복음교회
(모두 통틀어서) 37
3
40
포도원교회
8
11
17
36
교회 합계
 
399
448
847
<표 1>에서 살펴보면 모슬포 교회의 숫자는 약 6개 정도로 모슬포 교회의 교도의 수가 모슬포 전체의 개신교도의 수에 비해 약 48.4%를 차지한다. 즉, 교도의 수가 많은 것은 곧바로 그 지역적 영향력이 모슬포 교회가 주도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본 연구에서는 그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모슬포 교회를 중심적으로 연구를 진행 할 것이다.
이상에서의 두 가지 요인을 가지고 모슬포 교회를 모슬포 지역 개신교의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어떤 연구에도 해당하듯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개신교도의 수 대비 모슬포 교회의 교도 수가 절반 정도를 차지하여 지역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예상된다는 것이기 때문이지 절대적으로 이 연구와 해석이 모슬포 개신교의 모습을 모두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개신교의 교파의 숫자가 너무 많고 본원적인 성격은 비슷하나 세부적 교리와 사상에 대한 차이점이 있을 수 있는 점을 고려하여, 현재 모슬포 지역에서 모슬포 교회를 비롯하여 모슬포 제일 교회 등이 포함되어 상당수가 '개신교장로회'에 포함되기 때문에 연구의 과정에서 개신교라고 함은 '개신교장로회'임을 밝히는 바이다.
구체적인 분석을 위해서 문헌연구방법과 심층면접방법, 특히 구술사 방법을 병행해 사용할 것이다. 문헌연구방법으로는 모슬포 교회에서 2009년 발간한「모슬포 교회 100년사」를 중심적으로 바라보고 개신교의 성향에 관한 연구, 개신교의 토착화에 대한 연구, 개신교의 사회봉사활동의 성격 및 기능에 대한 연구 등의 논문을 참조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면접 대상과 라포관계를 형성하여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거의 역사적 상황이 「모슬포 교회 100년사」가 객관적으로 서술되지 못한 부분을 고려하고, 당시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것을 목적으로 구술사 방법을 사용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 연구에서는 모슬포 교회의 역사와 과거에의 지역과의 연계성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 구술 생애사의 방법을 사용할 예정이다. 구술 생애사란 구술사 연구 방법의 한 가지 방법으로 한 개인이 현재까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타인의 글로써 서술되어 나타나는 기록으로서 특정 사건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개인의 삶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서술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개인이 겪었던 직접적 사건, 제 3자의 입장에서의 간접적 사건에 대한 특정 사건에 국한된 이야기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구술 증언의 방법도 사용될 수 있다.
구술 생애사 및 구술 증언의 대상자는 모슬포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그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해 줄 수 있는 인물을 삼고자 하였다. 그래서 모슬포 교회의 역사와 과거의 모습,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함께 증언해 줄 수 있는 모슬포 교회의 ‘장로’인 이백년(94세)과 지봉수(86세)를 대상으로 하려 하였으나 이백년은 현재 인터뷰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봉수 한 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지봉수는 오랫동안 모슬포 교회의 ‘장로’의 직을 맡아왔던 모슬포 교회 역사의 산 증인으로 비단 모슬포 교회 뿐 아니라 마을 전반에 관한 대표성을 띠는 임무도 맡아왔었기 때문에 인터뷰의 대상으로 적합하다고 사료된다.
또한, 모슬포 교회의 현재 담임목사인 손재운과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80년대 송악산 군사기지 반대 운동을 이끌었던 양영운과의 인터뷰 또한 진행하였다. 비신도는 하모3리, 상모2리 노인회관을 대상으로 하여 노인들에게 구슬 증언의 형식으로 인터뷰를 취하였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의 한계점으로 첫째, 본 연구는 모슬포 지역에서의 국한된 개신교의 영향력의 파악을 목적으로 둔 것으로 타 지역과 같은 형태의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즉, 일반화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구술 생애사라는 방법론적 한계에서 나타나듯이 국한적인 인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적 방법으로 인하여 아무리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모슬포 지역 사회 내의 개신교의 영향력 전부를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고, 이는 한계점으로 지적 될 수 있다는 점이다.
 
 
Ⅱ. 본론 : 모슬포에서의 모슬포 교회의 성장과 토착화
본 장에서는 모슬포 교회의 역사와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모슬포 교회가 지역사회와 어떤 방식으로 토착화 되는지에 대한 과정과 토착화 정도에 대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에 대한 분석의 틀은 종교의 토착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요소들을 기준으로 하여 모슬포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러한 기준들이 어떻게 작용하고 토착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 요소들이란 첫째, 역사적 상황이다. 모슬포 교회의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그 역사의 특수적 사건이 지역적 요구와 부합하는지 그 당시의 상황과 부합하는지 부합한다면 어떻게 그 상황 속에서 모슬포 교회는 토착화에 성공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지역사회 문제의 참여이다. 역사의 흐름이 지속됨에 따라 사회는 복잡해지고 그 문제 또한 복잡성・전문성을 띠게 되는데, 이에 대응하는 모슬포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토착화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 지역 문화 활동 및 봉사활동 등에 대한 참여이다. 이는 현재 전국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종교의 기능이며, 특히 그 종교에 대한 이미지에 직결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활동들이 토착화에 기여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모슬포 교회의 역사적 상황에 따른 토착화(1909 - 1960년대)
 
1908년 한국 최초의 목사 중 7명 중 한 명인 이기풍이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어 제주도에 개신교가 전파되었다. 초창기에는 제주시와 그 근교의 지역에서 성안교회 등 3개의 교회가 설립되어 선교가 진행되었으며, 선교와는 무관하게 자생적으로 생겨난 금석교회 등 총 4개의 교회가 설립되어 개신교의 전래와 동시에 빠른 속도로 기독교의 전파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빠른 속도의 교세 확장은 개신교 자체의 교리적 매력이 그 이유라기보다는 육지를 오고가며 믿게 되었던 기존의 신자집단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 뿐 아니라 제주로 유배되었던 박영효의 영향을 받아 서양학문과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집단이 존재했고, 이러한 두 집단들의 만남과 교류는 개신교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될 수 있었으며, 이들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은 제주도 교세 확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제주시와 근교 지역에서의 순조로운 선교의 진행은 곧바로 제주시 외의 다른 지역에 대한 선교의 움직임으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었고, 1년 만에 산남지역에서 최초의 교회인 모슬포 교회가 창립되기에 이른다. 모슬포 교회는 1909년 9월 1일, 당시 목사였던 이기풍을 중심으로 하여 창립예배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912년 모슬포 교회 건물이 건설되면서 본격적인 성장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1912(壬子)
제주도 모슬포교회가 설립 되다. 일찍이 노회에서 파송한 전도목사 이기풍이 이재순, 강병한, 최대현 등과 협력 전도하여 강홍주, 정응호, 신창호, 김씨 나오 등을 얻고, 그 후 전도목사 윤식명과 전도인 원용혁, 김경신 등의 전도로 이씨 화숙, 김씨 순전, 고씨 수선과 송경서, 최정숙, 고계형, 장예규, 고훈장의 부인 등이 신종하여 신창호 가에 회집하여 예배하다가 연보하여 초가 예배당을 건축하니라.
다음에서 보듯이 모슬포 지역의 초기 개신교의 모습은 적극적인 선교 활동이 진행되었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이기풍, 윤식명 등이 활약을 했다. 특히 이들은 이경필과 함께 제주도 초기 개신교를 개척한 목사 3걸로서 지목되기도 하며 모두 모슬포 교회의 목사를 맡은 바 있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이기풍 목사가 재직을 하고 그 후임으로 온 사람이 바로 개신교 개척 3걸 중에 한 명인 윤식명이다. 「모슬포교회 100년사」(2009)에 따르면, 교회를 개척한 인물은 이기풍이지만 실질적으로 모슬포교회를 성립시키고 발전시킨 인물은 윤식명이라 평가한다. 그는 모슬포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광역적인 선교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선교활동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18년까지 순조로운 선교활동을 벌이던 윤식명 목사 일행들은 ‘환란’이라는 사건을 겪게 된다. 이는 제주지역에서의 토착적인 종교가 아직 뿌리깊이 박혀 있었으며, 이는 선교활동을 가장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모슬포 교회 100년사」에서는 모슬포 지역에서의 선교활동의 어려운 상황은 서술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모슬포 지역에서도 광역적으로 토착종교가 분명히 존재하고 뿌리 깊게 박혀 있었으며, 모슬포에서의 선교활동도 그렇게 쉽게 전개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919년 3・1운동은 그러한 어려운 국면을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계기로 작용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모슬포의 일제시기 초기의 생활상을 현재 생생한 증언을 해줄 인터뷰 대상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들을 수는 없지만 진관훈(1999)의 연구를 통해 당시의 농촌 생활수준을 알 수 있었다. 육지부에서는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일 1910년대와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농촌 경제의 상황은 별로 좋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제주도는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게 된다. 자작농 중심의 소경영과 반농반어, 여성인력, 풍부한 농촌유휴인력 등의 특징을 가지는 제주도 농촌경제는 일본과의 직항로와 연안항로 등의 교통의 발달로 경제적 변동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하였으며, 이는 제주도민들이 육지부나 일본으로 출가하거나 이민하는 사례가 늘고 도내상업 및 해외무역이 증가하여 자본의 증가와 상업 구조에서의 탄력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즉, 이는 기존에 자급자족하고 고립적이었던 제주 농촌 경제의 변화를 이끌게 된다. 농업 생산력과 어로기술의 향상으로 농업, 어업 등이 자급자족이 아닌 판매 위주로 바뀌게 되면서 식민지 시장경제체제로 편입되었으며, 생산과 판매, 소비가 위주가 되는 자본주의적 농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일본인들이 상업 활동을 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에 불만이 없었냐는 질문에 대한 지봉수의 답변 내용이다.
 
뭐 그다지 불만이라고 헐건 없지, 그 사람들 그 사람대로 와서 뭐 그렇게 장사해먹고 그렇게 허니까. 그 이면에는 그 사람들이 뭐 이제... 밭도 사고 땅도 사고, 막 그렇게 허면서 그 법적으로 여기 사람들이 허지 못하는 것들을 그 사람들이 알아가지고 뭐... 이제 밭 이전 안한 것들 이전하기도 하고 다 그렇게 이제... 우리 여기가 미개하니까 그렇게 했지만은 그건 그때는 몰랐으니까 그때 그 사람들은 뭐 여기 와서 살거니 먹고 살거니 그렇게 했지만은 내줘보니까
 
위의 내용은 지봉수가 어렸을 적인 1930년대 중반기로 추정되는 그 당시의 상황이다. 이 인터뷰 자료를 이용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유는 시기는 다르지만 일본의 식민지 상황이라는 시대적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때 1910년대 상황과 1930년대 중반의 상황은 절대적으로 같을 수는 없으나 시대적 공통점을 고려했을 때, 매우 흡사한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그 시대적 분위기는 흡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인들이 제주도로 건너와 장사를 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당시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이 특별히 자신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는 한 일본인에 대한 불만은 없어 보인다. 즉, 전체적으로 일제 시기의 모슬포의 경제는 좋은 편이었으며, 자본경제체제로의 편입은 그들로 하여금 일제 시기의 저항의 모습보다는 현실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대한 순응이라는 만족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1919년 3・1운동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저항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는 측면으로 작용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임시정부 독립군자금 모금사건’이다. 이 사건은 목사였던 윤식명 등 여러 교인들이 구속되면서 일단락되는데, 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모슬포 교회가 윤식명을 중심으로 하여 적극적인 민족투쟁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 사건은 교세 확장에 시작점이 될 수 있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모슬포 교회 100년사」에 따르면 1917년의 신도의 수가 40여 명에 불과하였지만 1921년에 이르면 그 수가 무려 3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적극적인 선교활동과 민족주의적인 반일저항운동이 결합되어 나타난 가시적인 성과라고 할 수가 있겠다.
한편 이러한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아지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 이유는 1910년대 이후의 교육은 일제의 민족 탄압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로 구성된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였으며, 고등교육의 이수를 방해하고 초급 수준의 교육과 기술 교육에만 치중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교육에서의 탄압은 민족적 열기를 더욱 가중 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일찍이 제주도에서는 최초의 학교인 제주보통학교(1907년 개교)를 시작으로 하여 정의보통학교(1909년 개교), 대정보통학교(1911년) 등 공립보통학교 3개소가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3개소의 학교는 제주도 내부에서는 터무니없이 모자란 수였다. 이러한 이유로 통학권에서 벗어난 마을에서는 주민 스스로 개량서당인 ‘의숙(義塾)’이라고 하는 교육기관의 탄생을 가져온다.
‘의숙’에 대한 선행연구 자료는 존재하지 않지만 정선영(2007)의 ‘개량서당’에 대한 연구가 존재하였다. 여기서 상당수의 ‘의숙’을 개량서당의 범주 안에 포함시켜 서술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개량서당’이 사설 및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한문, 일본어, 산술 등을 가르치는 초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량서당'이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총독부의 재정부족에서 기인한다고 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항일구국운동의 본산지로서 민족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을 제공하였으며, 적극적 민족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개량서당’이었다고 하였다.
위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모슬포 교회에서의 지역사회 교육 활동을 살펴보면 ‘광선의숙(光鮮義塾)’의 성립을 들 수 있다. 1920년 7월, 민족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당시 모슬포 교회의 목사인 윤식명은 교육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개신교 전파와 민족문화 창달을 위해 이름을 ‘조선을 광복한다.’라는 뜻으로 ‘광선(光鮮)의숙’이라 명명하고 운영하였다. 초기 ‘광선의숙’은 소학교 6년 초등교육과정으로 개설하였으나, 1923년 고등 소학 2년 과정의 보습과를 두어 청소년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여성 문맹퇴치를 위한 부인야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또한 ‘광선의숙’의 여러 교사들의 상당수는 독립투사였고 이들에 의한 청소년 교육은 항일정신 및 사상교육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부분으로 작용하였으며, 교사 스스로 제주도와 육지를 오고가며 활발한 독립활동을 벌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규언과 정동규가 대표적이다. 다음 글은 지봉수가 과거에 ‘광선의숙’에 대한 정보를 모은 하나의 쪽지에 적혀있던 내용 중 일부이다.
 
1927년도에는 5학년생이 6학년이 되니 다시 5학년을 모집하여 5,6 학년이 되었다. 모집학생은 문달모, 김정선, 이대근, 재씨등 10여명이라 한다. 이때 강문석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가고 대신 가파도 신유의숙에 있던 장종식 선생이 왔다. 교과목은 국어 산수 지리 역사 창가 등으로 신문화를 배우며 민족정신과 항일사상 주입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어느 강의 시간에 오대진 선생이 강의를 할 때 보니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하고 물으니 학생들은 ‘우리는 조선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선생이 무릎을 탁 치면서 ‘옳지! 우리는 조선 사람입니다. 또 우리는 장래에 무엇을 할 사람입니까?’ 하고 물으니 ‘우리는 사회 나가서 큰일을 할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선생이 무릎을 탁 치면서 ‘옳지! 우리는 장래에 큰일을 할 사람입니다’ 라는 등으로 강의를 하더라고 하였다.
 
이러한 ‘광선의숙’의 항일 독립적 성격과 민중 계몽적 성격은 일제로 하여금 탄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공하였고, 결국 1929년 ‘광선의숙’은 폐교되고 말았다. 다음은 폐교 당시의 상황을 담은 녹취문을 모슬포 교회 100년사에서 인용한 글이다.
모슬포에는 광선의숙이라는 사설 학교가 있었는데 민족교육을 한다는 이유로 감시 대상이 되어 일본 경관이 교실 입구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을 하였으니 얼마나 민족의식 말살에 혈안이 되었던가를 알 수 있다. 모슬포 출신으로 관공서에 근무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또 젊은 사람이 육지에 출입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였다. 모슬포항에서 목포행 배를 탈 때에는 목포경찰서로 연락하여 뒤를 좋고 목포역에서는 벌써 형사가 대기하였다가 조사를 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 일본은 민족적인 교육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광선의숙’을 포함한 모슬포 전역의 ‘의숙’을 대상으로 한 감시가 계속되었으며, 30년대의 본격적인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서서히 민족 말살 정책이 시작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일제의 탄압은 매우 강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폐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선의숙’이 모슬포 사회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 영향력으로서는 첫째, ‘광선의숙’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적극적인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여 모슬포 사회에 민족의식과 함께 공동체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저항의 모습은 충분히 모슬포 사회에 현실에만 만족하는 일반 사람들의 의식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당시 부족했던 교육기관에 대한 모슬포 지역주민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것이었다. ‘의숙’이 모슬포에 ‘광선의숙’을 제외하고 하나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 대표적인 교육기관 중 하나로서 충분히 모슬포 사회 내부의 교육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광선의숙’의 민족적인 성격은 앞으로 수 십 년 동안 모슬포 교회가 모슬포 사회에서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모슬포 교회의 지역에서의 토착화에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모슬포 교회는 적극적인 민족의식 고취를 통해 교세가 확장된 이유를 제외하고 다른 국면으로도 교세를 확장하게 된다. 다음은 지봉수의 인터뷰 내용이다.
 
처음에 나갈 때는 그런 거는 아니지만은 내 중에 설교도 듣고 자기 공부하고도 하면 교리 뭐니 알아지지만은 처음에는 그런게 없이 갔죠.. 그리고 첨에 제가 말한 거처럼 그 당시.. 그럴 때는 사태가 그러니까 교회 나갔지만은 사태에 따라서 시국에 따라서 나갔지만은 그 전에 사람들은 교회가 좋다고 해서 나간 것이 아니고 병 따문에 나간거죠 병 따문에 여기서 그 때 약도 많이.. 약이라고 하는 것은 초약이지.. 감기걸리면 밀감을 유자를 먹는 다던가 그런걸로 다 해 먹고 또 이제 병원도 있지만 병원도 가지를 안했지 초약으로 살고 그렇게 하다가도 못 고치는 병들이 있거든 그런 병들이 교회가 여기 생겨가지고 기도하고 해서 병들이 낫거든요 그러니까 병자들이 교회에 자주 간거라 처음에는 그래서 교회가 시작되어서 내 중에는 아들 나으면 훌륭한 사람도 나고 이렇게 하니까 교회가 좀 진보적인 걸음을 했지만은 교리가 좋다고 해서 교회 가겠다 하는 그런 사람은 별로 없었지
 
당시 제주사회에서는 민간신앙이 아직도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개신교 교세 확장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인다. 즉, 당시 병을 고치고자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개신교가 서양의 종교로서 ‘유일신’의 의미가 아닌 단지 하나의 여러 명의 신들 중 일부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문맹율이 높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교리에 대한 매력을 느껴서 교회를 간 것이 아니라 ‘예수’ 앞에 빌면 기적이 일어나 병이 고쳐진다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기적’이 입소문을 타면서 광범위하게 퍼져 교회의 교세 확장의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광선의숙’의 폐교 이후 30-40년대의 일제의 민족말살통치에 접어들면서 개신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서정민(2009)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개신교는 일본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대립되는 하나의 신앙으로 취급되었고, 일제는 이들을 ‘정치적 저항자’들로 간주하여 단죄하였다. 이에 따라 개신교 차원에서의 저항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종교성을 끝까지 유지하고 극 보수 신앙이 가장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저항 그룹이 되는 독특한 특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일제 천황에 대한 신사참배에 대한 전 장로교 개신교 차원에서의 순응과 더불어 제주노회의 순응은 전 개신교의 성격 자체를 바꾸어 놓게 된다. 그럼에도 모슬포 교회에서는 적극적인 저항을 계속적으로 진행한다. 당시 목사였던 조의환은 신사참배 순응에 대한 격렬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결국 1943년 6월 18일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사임되게 된다. 강력한 힘을 가진 저항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저항의 정신은 모슬포 본연의 성격과 결부되어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종교와 지역의 연결고리가 계속적으로 유지된 상황에서 지역종교로서의 큰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바로 4․3 사건이다.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년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 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된 제주의 비극이었다. 이 때 희생자의 수는 약 3만 명으로 당시 제주 인구의 10%나 되었다. 모슬포 지역은 ‘백조일손지묘’ 사건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다. 당시 모슬포 교회의 목사는 조남수로, 1947년 9월 4․3 사건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혼란스러운 모슬포에 부임하였다. 당시 모슬포에서는 군경과 대화를 하면 무조건 총을 쏘아버리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군경과 말을 하는 민간인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당시 조남수는 죄 없는 민간인이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슬포경찰서로 뛰어 들어갔다. 다음은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보고 들은 지봉수의 인터뷰 내용이다.
 
전쟁 때 아니여, 그니까 집에 가서 ‘우리 산에서 왔는데 쌀 좀 주쇼’ 하믄 안 줄 수 이서? ‘우린 산사람 싫으니까 안 주겠소’ 할 수 있냔 말이야. 그러믄 죽이는 거니까 그때는. 그렇게 한 사람들이 전부거든. 옷 줬다 뭐 그렇게 쌀 줬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 이시믄 다 죽인거라. 게니까 조남수 목사님은, 조남수 목사님 말하니까 이말 하는거라이? 조남수 목사가 이렇게 누구가 이녁 가족 데리고 또 더구나 밤이 와서 안주면 이거 그들도 죽일 판인데 죽일 판인데 ,안 줄 수가 있느냐. 부득불 할 수 없이 주는 것도 거 무신 꼭 산 사람을 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할 수 없이 줬거든. 그런 사람들을 죽이니까 이것이 죄냐, 그러니까 이런 사람을 살려야 되겠다.
 
위의 인터뷰 내용과 같이 조남수는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이 직접적으로 문형순 경찰응원대장과의 면담을 요청한다. 조남수는 논리적으로 현재 경찰이 가지고 있는 명단이라는 것이 개신교도들을 제외하고 모든 도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은 공산주의자의 명단이 아닌 단순히 제주도민을 말살시키려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경찰응원대장에게 자신의 해결방안을 제시해주겠노라고 한다. 첫째로, 도민을 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쌀, 돈, 양말 등을 공비들에게 내주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목숨을 위해서 내준 것이니 절대로 죄가 아니다. 솔직히 자수만 하면 용서한다.’라고 한다면 아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둘째, 부락주위에 성을 쌓아 경비를 강화하고 공비를 잡는 것이라고 했으며, 마지막으로 경찰의 공포 분위기를 해소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제안은 문형순은 허욱 경비대장에게 소개까지 해주면서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여졌고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였다. 자수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던 것이었다. 다음은 그에 관련된 지봉수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그 사람들이 (중략) 자수안하면 다 죽인다 그리게든 자수를 안하다가 나중에는 그 사람들이 그 조 목사님이 막 울면서 강의하고 하니까 자수했어. 그게 한 300명 내지 200명 됬어요. 근데 그 사람들이 다 살았잖아?
 
조남수 목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문형순과 허욱에게 절대로 자수하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고 자수강연에 들어갔다. 공비에게 생필품을 어쩔 수 없이 제공한 것은 죄가 아니며, 지금 자수를 하면 절대로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강연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하나둘 씩 자수를 하기 시작했고, 그 수는 제주 서부지역 전체적으로 퍼져 약 2,000명 가량의 자수자를 만들어 내어 수많은 목숨을 살렸다고 한다.
그 뿐 아니라 대정교회 유화평 전도사가 자신의 친척이 억울하게 처형당하게 생겼다며 조남수에게 간곡히 부탁하자 직접 다시 허욱과 면담하여 유화평의 친척 2명을 살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남은 18명이 문제였다. 조남수는 그 남은 인원도 어차피 공산주의자 중에서 찌꺼기 분자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들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고, 처음엔 거절하였다가 허락하여 그들의 목숨도 모두 살렸다고 한다. 다음 내용은 「모슬포 교회 100년사」에 담겨있는 유화평의 조카인 양남룡의 인터뷰 내용이다.
 
인성리에 내 외삼촌이 급보를 받고 모슬포교회 조남수 목사를 찾아가서 실정을 털어놓고 살려주기를 애원하였다. 조 목사의 말이면 군에서도 잘 통하는 사실을 알았던 모양이었다. 조 목사의 주선으로 우리 부자뿐 아니라 20명의 같은 운명의 사람들을 조 목사가 인솔하고 부대를 빠져나왔다. 처음에 우리들은 총살장으로 가는 줄만 알았는데 조 목사의 인솔에 영문을 모르고 불안 중에 따라갔었다. 그런데 모슬포교회당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앉혀놓고 설명하는 말을 듣고서야 살게 된 것을 알았다.
 
이러한 조남수의 활약은 모슬포 지역사회의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일단 교인의 숫자가 확연히 늘어난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처음에는 교회로 들어온 것이지만 조남수의 진실한 모습에 점차 개신교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개종한 것이었다. 다음은 과거 모슬포 교회의 교인의 총수를 표로 제시한 것이다.
 

<표 2>

 
연도
교인총수
39.4 - 40.3
345
해방 전
80
해방 후
150
48.3 - 49.2
204
49.3 - 50.2
363
52
400(성년 남100 여150, 유년 남70 여80)

<표 2>를 참조하여 보면 개신교가 모슬포 사회에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접근하였던 과거에는 신도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 345명이나 되었지만 40년대 장로회 및 제주노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게 되면서 신도의 숫자는 급격히 줄게 된다. 이는 전국적인 개신교의 추세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하는 개신교가 신사참배를 허용한다는 것은 교리 상의 논리성에도 모순이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슬포 교회는 조의환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적극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다가 사임을 하게 되는 사건도 일어날 만큼 그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게 되었지만 이는 효과가 없었다. 다음은 그에 관련한 지봉수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렇게 하면 교회가 안되니까 우리가 그 꼭 일본에 천황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하자 결의를 했거든. 총회에서 게니까 그때에 우리는 할 수 없다고 해가지고 나간사람들이 있다 이말이지. 게니까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니까 관에서 일본사람들이 주목할거 아니여이 그러니까 이제 그 데고지 손가락을 다 찌리고 그렇게 고문을 했거든 그러니까 그때 나선 사람들은 손가락이 없는 사람이다. 손꼽들이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때 고문당한사람들이 거든 아니 교회가 전부 신사참배를 반대하자고 결의를 했는데 안한다고 하니까 오죽하겠어 그 사람들이.
 
그러나 해방 후 모슬포 사회에서 개신교의 영향력은 급증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계속해서 서술했던 모슬포 교회의 목사였던 조남수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인의 한 영향력으로 인하여 교세가 확장되고 지역종교로서의 토착화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고려해볼 때, 조남수에게 목숨을 담보받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다수 존재하였으며, 이는 교세확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4・3사건은 모슬포 교회 입장에서 볼 때 비극이자 지역종교로서의 발전에 큰 기회를 제공해준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토착화의 가능성을 가졌던 모슬포 교회는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전쟁에서의 제주도의 피해란 사실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육지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전쟁 중에도 안전지대에 속할 수 있었으며, 육지부의 수 많은 피난민이 몰려와 인구는 갑자기 급증하게 된다.
그러니까 육이오 나고 대구까지 왔잖아이? 낙동강까지 왔거든? 낙동강까지 오니까 서울에서 다 피난왔잖아이 게니까 제주도 피난민들 가득히 왔는디 게니까 그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이 그냥 왔으니까 뭐 각 읍면마다 간디서 그 사람들 뭐 보호해가지고 살도록 했는데 우리모슬포 교회도 여기 온 사람들을 한 삼백여만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하고 뭐 좀 직장이라도 가질 때까지 그렇게 해주고, 그러니까 그다음에는 천천히 휴전 되가지고 하니까 육지로 다 나가버렸지 나가 버렸는데 그 당시만 해서 여기가 그 먹을 것이 밥을 졸바로 못먹었거든 그렇게 했는데 (중략) 군인들 피난민하고 군인까지 오고하니까 여기 집이 한사람 사는 집인데 두 사람자고 두 사람 자는 집인데 시사람 네 사람까지 방 없으면 방을 꾸미면서 빌려줬어 그니까 군인까지들도 막 와서 방 빌리고 그러니까 그렇게 하니까 그때는 부대 여기 막 있자나 쌀도 갖다주고 그래가지고 이 대정에는 그.. 물자가 생활용품이 풍부했어. 그리고 그때 군인들이 막 밀려오니까 고구마나 떡이라도 정 가면 백킬리 나가면 팔아먹어. 군인들이나 군인들앞이도 . 그렇게 하니까 여기 사람들이 장사들도 벌고 외지사람들 오니까 집 빌려줘서 빌고 어 또 그래서 여기 그때만 해도 이 모슬포는 살기가 좋았어. 아! 게니까 그때 그 구호물자가 왔거든이? 구호물자 왔는디 모슬포교회 구호물자 왔어 와가지고 강냉이들 왔는데이 강냉이들 여기서 죽을 쒀가지고 점심때 이 여기 가져오면 한 낭푼씩 그래줬어. 그걸 나가했다고. 강냉이 죽을 쒀가지고 배급해주는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했지. 밥을 해대니까 점심때 그 강냉이죽 한 낭푼씩 주니까 그걸 갖다가 가족끼리 먹고 그랬어요. 아니 그때가 피난민들이니까 피난민들 교회댕기는 사람 많아 피난민들이 에..게난 그 사람들도 타먹고 그렇게 했는데 그렇게 해서 교회 나온 사람들도 많지
 
위는 지봉수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로 피난온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모슬포 지역에 많이 모여 살았다는 내용과 함께 그 들이 정착할 수 있을 때까지 식량으로서 강냉이 죽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옷 제공했지, 그때 구제품이라고 해가지고 왔지. 그러니까 그저 그때가 그 잉여농산물, 미국에 잉여농산물, 미국에서 남아돌아가는 농산물 있잖아. 우리 한국에서도 지금 뭐 쌀이 남잖아이? 게고 지금 집집마다 지금 옷이 잔뜩 있어서 입지 않허는 옷도 있잖아이? 그런 것들을 그때 당시 미국에서 우리 한국에 보냈거든. 그렇게 허니까 그걸 여기서는 막 좋은 걸로 막 다투면서 그 타고 그렇게 이제 했단 말이주게, 그렇게 해가지고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여기가 못살때니까 그때 의류 그런 옷도 막 와서 교회 오면 갈라 입고 거기 허고 또 농산물 아니 쌀도 그렇게 보내주고 특히 아주 곤란허니까 강냉이 보내가지고 허니까 여기서 죽 쒀가지고 점심들 헌때 나눠주고 그렇게 제가 헌 기억이 지금 있는데, 지금도 만약에 우리 미국에서 그렇게 구제품, 구제품이라고 해서 왔지만은 지금도 우리 이.. 지금 우리가 이제 잘 사니까 옷이 많이 있어가지고 그때는 옷이 어섯지만은 옷이 많이 있잖아이? 많이 있어도 입지 않혀는 옷이 있잖아게, 필요 없는 옷인데 잔뜩 있거든. 그와 같이 이 무슨 그.. 그 미국에서도 그 당시에는 그런 상태란 말이야이, 입지 안혀는 옷들이 많이 있어서, 게니까 그걸 모아가지고 여기 보내주었는데 여기선 좋은 옷으로 많이 입었단 그 말이 주게. ...그리고 강냉이도 여기 주었는데 오죽해야 강냉이 줘서 주니까 또 우리는 그것을 죽을 쒀서 나눠먹고 허겠어. 막 어려웠주게, 그마만큼. 피난온 사람들도 허고, 그때 피난 온 사람들도 여기 와서 잘 살았어. 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이 왔지만은 피난 온 사람들은 서울에서 대개 이.. 이 장사들이니 뭐니 허던 사람들이 피난하러 여기 오니까 아마 대게 세상을 알잖아 대게. 우리가 농사도 고만히 짓는 것을 보단 보단, 그 사람들은 도시에서 살았고 또 피난왔고 그러니까 우리가 뭣을 해서 어떻게 살아야 되지 허는 그런 생활의욕이 강한 사람들이거든. 게난 피난민들이 먼저 와서 장사도 하고 다 하고 그러면서 그 사람들 잘 살았다고.
 
또한 옷 등의 구호물품을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아 제공해주기도 하면서 피난민들에 대한 전교활동도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피난민들은 이미 도시에 거주하면서 여러 사회생활을 겪어 왔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정착하여 사는 데 무리가 없었으며, 오히려 여기서 장사를 하여 모슬포 지역 주민들만큼이나 풍요롭게 생활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러한 한국전쟁에서의 구호품의 제공은 4․ 3 사건 이후 개신교의 토착화를 더욱더 진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모슬포 지역 주민들에 대한 구호품이 아닌 바로 피난민들에 대한 구호였다는 사실이었다. 위의 진관훈(1999)의 연구와 비신도의 구술증언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당시 제주도 및 모슬포의 경제적 사정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구호물품에 대한 혜택을 받은 사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피난민들은 도움을 받고 종전이 되어 다시 육지부로 올라가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며, 다시 급격히 불어났던 교세는 축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어려운 역사적 상황을 모두 겪고 이제는 현재 만족된 삶을 살고 있는 모슬포 주민으로서는 더 이상 교회는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이후가 되면 더 이상 교세확장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본래 다니고 있던 사람들조차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경우도 생겼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이 가속화 되면서 교회는 또다시 새로운 국면으로의 사회선교활동의 전개를 시작하게 된다. 바로 교육활동이다. 당시 광선의숙의 맥을 잇는다고 하여 ‘광선고등공민학교’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광선의숙과 다르게 모슬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다. 아래는 지봉수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그렇게 몇 해 허다가... 다 뿌개져 버리고 또 젤 첨에 여기 다 모영 살았지만은 에.... 사건이 이제 서서히 끝나고 그러니깐 다 육지로 가버리고, 또 학교덜도 그때 이제 그때는 고등학교.... 그때는.. 학교가 없었거든 여기 고등학교 없고 허니깐 허다가. 고등학교 생기고 하니깐 다 학교들 다고 다 그렇게 했지 에 그러니깐 오래 못헌거지...
 
「모슬포교회 100년사」에 따르면, 본래는 광선고등공민학교는 모슬포소년훈련원이라고 하는 사립학원을 인가받아서 1951년부터 시작하였다고 한다. 개원 당시에는 161명이 입학 지원을 하였으며, 입학 가능했던 사람은 121명으로 개원하여 시작하였다고 한다. 1952년 11월 3일 남제주군 교육구청으로부터 고등공민학교 인가를 받고 개교하였으나 부지 문제로 인해 다시 1954년 1월부터 하모리 공회당을 빌려 개학하였다. 그러나 광선고등공민학교는 모슬포 전체적인 교육수준 향상의 의미보다는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 즉, 한글교육이나 문맹자를 위한 교육, 초등교육 수준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61년 2월 10일, 제주도지사가 교육법 제91조에 의거하여 폐쇄 명령을 내림에 따라 1951년 소년훈련원으로 시작된 이래 약 10년 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이렇게 광선고등공민학교가 저조한 수준으로 전개되었던 이유는 지봉수의 인터뷰 내용에 비추어 살펴보았을 때,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으로 내려와서 개신교의 혜택을 입고 적극적으로 개신교에 봉사하던 이들이 모두 육지부로 올라가버렸다는 것, 당시 대정중학교가 이미 1946년 개교하여 공립중학교가 이미 존재하였으며, 더구나 1952년에는 대정고등학교가 인가되어 운영됨으로써 지역사회에 중등교육기관이 이미 공립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자금 지원이나 시설에서 공립학교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으며, 따라서 광선고등공민학교는 제대로 발전되지 못하고 결국 폐교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슬포 교회가 시작된 후 광선고등공민학교 폐교까지의 역사는 모슬포 교회의 최고의 전성기였다. 모슬포 사회의 저항의 정신과 맞물려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다분히 내포하였던 모슬포 교회는 충분히 모슬포 주민들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익숙하지 않은 외래종교가 다분히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교육을 위해 자금이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모습은 식민지 시대의 모슬포 교회는 지역 종교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4・3사건을 겪으면서 개신교가 모슬포 사회에서의 토착화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당시 모슬포 사회는 전쟁에 대한 피해가 거의 전무하였으며, 피난민들에 대한 모슬포 교회의 적극적인 구호활동은 모슬포 주민들에게는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즉, 1953년 종전 후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육지부로 올라가면서 개신교의 지역적 토착화의 가능성은 희박한 국면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광선고등공민학교의 실패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부터 모슬포 교회는 지역적 토착화를 위해 다른 전략을 취해야 할 상황이었다.
2. 모슬포 교회와 지역사회 문제 참여에 대한 토착화(1970-1980년대)
 
모슬포 교회의 1970~80년대의 모습을 살펴보면, 4・3사건이라는 결정적 계기를 두고 개신교의 토착화의 성과를 얻은 모슬포 교회가 이 당시에는 지역사회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에 따라, 토착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하게 되는지를 살펴 볼 수 있다.
1951년 광선고등공민학교의 설립이후의 모슬포 교회의 활동은 이전의 개신교의 지역 토착화에 미친 영향력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그를 유지시키거나 오히려 토착화와 멀어지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사회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라는 권위주의적 사회체제를 맞이하게 되었고, 군부 독재적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많은 민주화의 세력들이 사회운동들이 펼쳐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시민사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었던 개신교의 활동방향을 살펴보면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정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개신교에서 활발한 민주화 운동의 전개는 극히 소수에게만 적용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 개신교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위치했던 것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라는 교단연합조직이었지만, 이 조직은 개신교 인구의 상대적 소수만을 포용하고 있었으며, 당시 협회 내에서도 신학적, 정치적 진보세력은 소수에 불과했다. 전체적인 개신교의 움직임은 개신교의 소수, 진보세력이 사회참여 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하려 하였으나 다수 보수적 기독교 세력이 여전히 친 정권적 입장을 취하면서 내부적으로 교회의 성장과 그 양적 성장을 통한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 확대를 추진해 나갔다. 기존의 교회의 성격에 대한 선행연구는 주로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거시적인 시각으로 서술된 것이지만 본 장에서는 미시적인 측면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말하자면, 당시 한국사회 전체의 시대적 요구 사항이 민주화였던 것처럼, 지역사회의 요구사항은 정치로서의 민주화를 포함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당면한 문제에 대한 민주적인 대처와 적극적인 참여가 요청되었다는 관점을 수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하여 개신교의 성격에 따른 모슬포 교회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지역과의 융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했는가에 대해 해석을 기하고자 한다.
당시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의 개신교의 전체적 움직임과 모슬포 교회의 움직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3사건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을 통해 얻어진 모슬포 지역사회에서의 개신교의 토착화의 가능성은 크게 발전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2년 모슬포 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지역사회의 정치적 측면보다는 당시 도시로의 이촌향도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침체되기 시작했던 지역사회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역사회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목표아래 사회운동을 펼치고자 하는 움직임을 펼치게 된다. 그 움직임이 모슬포 지역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모슬포교회 건립 70주년을 맞이한 1982년, 당시 서귀포에 세기교회를 개척하고 신협 운동을 벌여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조남수 목사에 제안에 따라 제직회를 모집, ‘모슬포 교회에서도 신용조합을 설립하여 많은 교인들이 서로 간에 편리를 도모할 수 있도록 적극 참여를 요망’하며 신용협동조합 설립 추진 건을 논의하였고 다음해인 83년 10월 9일 제직회에서 제직들은 신용협동조합을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은 지봉수의 인터뷰 내용이다.
 
교인들이 있지 그거는 교인들만, 교인들만 해가지고 그 말하자면은 자기가 저축하는 거거든 하루에 한 달에 하루에 얼마든가 하면 누가 나서서 그 돈을 다 몽그려 받아오고 그러면 돈이 얼마 되잖아요 그럼 자본이 되면 또 누구 뭐 장사해서 자본하는 사람 자본 꿰어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유지한 거거든 그 당시 그걸 하다가 나도 이사장을 오래했는데 하다가 결국 해가지고 돈을 꿔가지고 잘 된 사람 지금 처음에 지금도 얼굴 쉽게 말하자면 저기 누구 무슨 서점 백과서점도 뭐 백손해 해가지고 그때 자본 꿔서 시작해가지고 지금 잘되고 있잖아요. 신협이라고 한 것이 이걸 끝까지 유지를 못해가지고 하다가 그 폐소 됐지만은 헐 때는 잘하다가 나중에 그걸 이어가지 못했지
 
모슬포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설립되었지만 신용협동조합의 설립은 부분적인 성과는 거둘 수 있었으나 모슬포 지역사회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모슬포 전체 지역사회의 경제를 담당하기 위해 설립되어 운영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저축의 수단으로 대부분 사용되고 사업자금 대출 등에 대한 부분은 특별히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4~5년 만에 폐지되게 되었다.
한편, 모슬포 교회의 전체적인 운영 방향과는 달리 일부 소수의 교회 세력들은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 쟁취를 위한 운동을 교회 단위로 이루고자 하는 세력들이 존재하였다. 바로 그 인물이 모슬포 교회의 집사인 양영운이다. 양용운의 아버지는 독특하게 성경을 읽고 교리에 대한 매력을 느껴 교회를 다녔으며, 앙영운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그 곳에서 바로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사람이 1976년 5월 모슬포 교회 11대 목사로 부임했던 모갑경이다. 모갑경은 본래 육지부에서 목사를 하던 인물이었으나 유신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치다가 징역살이를 하였고, 결국 제주도로 좌천되어 모슬포 교회 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었다. 모갑경의 그러한 저항적 성격은 바로 ‘명동 사건’에 대한 태도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모갑경은 ‘명동 사건’에 대한 지지의 성명을 내고 그 사건을 위한 ‘예배’를 거행하는 등의 징역살이를 한 후이기에 소극적으로 전개하였지만 이는 양영운의 인생관을 바꾸어 놓는 계기로 작용한다.
 
나의 인생관을 완전히 바꿔 놓으신 분이 모갑경목사님이라고. 그.... 모갑경목사님을 통해가지고 민족신앙이라는... 지금.. 전국에서 기독교가 기장이 걸어가고자 하는 모든 부분을 모갑경목사님한테 내가 전부 들었지.
 
모슬포 교회의 사회적 참여가 소수에 불과했던 상황 속에서, 1988년 가을 양영운은 모슬포 알뜨르와 송악산 일대에 미군 공군기지가 들어선다고 소식을 접하게 된다. 소수로 움직이고 있던 모슬포교회의 양영운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운동참여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모여 모슬포 지역 주민들과 제주도민이 거세게 송악산 군대기지 반대운동을 펼쳐 나갔다. 송악산 군대기지 반대운동은 민주화 운동에 연장선상에서 교회가 사회에 밀접한 연관을 맺어야 한다는 취지하에 모슬포교회의 청년회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모슬포 군사기지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양영운의 인터뷰 내용을 통하여 군사기지 반대운동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주신문에서 ‘송악산 군사기지 들어선다.’라고 하는 투에 송악산 개발 백지화해가지고 신문기사를 낸다고 그걸 스크랩 해가지고 되게 확실한 물증을 잡아두었기 때문에 나중에 와서 중간에 이제 왔다 갔다하면서 얘기가 통하던 친구들이랑 후배들이랑 같이 얘기해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 아니냐 해서 그래서 공공기지 결사반대 대책준비위원회를 꾸리게 된다고 그래가지고 준비위원장을 맡고 그러다가 이제 88년도 인가 9월 26일 날짜도 안 잊어버렸네 추석바로뒷날인데 이제 사람들이 바쁘다가도 명절 때는 쉰다고 심적으로 편안한 날이니까 놀 수 있는 데 부담이 없겠다 해가지고 9월 26일 날 모슬포군사기지결사반대 결의대회 포스터를 같이 의논을 해가지고 포스터를 붙이게 된다고 준비위원회 차원에서 그래서 그날 생각 외로 그 엄청 많은 사람들이 그 운동장에 참석을 하고 그러면서 집회를 하면서 각 리마다 대책 위원회를 만들어 달라라고 하는 요구를 준비위원회에서 하고 리에서 대책위원회를 꾸려주게 되가지고 송악산 군사기지 결사반대 대정읍 공동대책위원회라는 것을 꾸리고 마을 분 우영진씨라고 그분이 위원장을 맡고 내가 사무국장을 맡고 그래서 그 반대운동의 줄거리로 집회를 여기서 내가 한 여러 번 했지 그런데 그 속에 교회도 참석해야한다 그래가지고 목사님 쪽에도 그때 말씀드리고 천주교 쪽에도 말씀드리고 해서 그래서 아마 그때 십자가 들고 천주교하고 기독교가 같이 참석 집회에 참석한 유일한 계기를 만들었지
마을 각 리마다 다 참석하고 교회가 참석하고 읍면지역에 있는 청년회 전부 참석하도록 권유해가지고 참석하고 게난 그 당시는 대단했지 대단했어. 그때 그때 모갑경목사님이랑 제주시에서 그난 실무간 사람이 있을 때니까. 지금은 시에니까. 그 싸움하는통에 맨날 여기 출.. 사무실끝나가지고 그래가지고 낮에는 못 보니까. 그래서, 좀 너무 싱겁게 싸움이 끝났어. 근데 아마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대정부 투쟁을 해가지고 더 나아가서 미군과 연결된 군사 계획 군사기지 계획에 대하서 철회를 시킨 건 세계적으로 유일하지 않을껀가 아마 몇 군대가 안될걸..?
 
양용운의 인터뷰 내용과 같이 모슬포 군사기지 설립 계획은 제주도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결국 군 당국이 취소하게 된다. 그에 관련한 지봉수의 인터뷰 내용이다.
 
그거 뭐 무슨 특별하게 한 게 아니고 그때 언제냐 그 학생들이나 대학교 청년들이 그때 주동돼서 했잖아 근데 그때 하루 대회를 했거든 모여서 그때 마침 주일날이니깐 우리도 그걸 참여하자 해가지고 교인 200여명이 갔지 이제 시내 강진해가지고 학교까지 가서 회의 참여했다 그거지 그래서 갔지 학교까지 가서 회의 참여했다 그거지 뭐 (모슬포 교회 목사가 군사 기지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하거나 했느냐의 물음에) 그런 것은 아니지 게니까 이제 그것은 교회에서도 반대를 했다 그것이 여론이 되는거 아니라 사회에서 그렇게 전문적으로 참여하진 않고 아 게니까 교인들에서도 있지 지금도 여기 양용운이도 있잖아 양용운이는 그런 것에 나서서 운동을 했지
 
지봉수의 인터뷰 내용을 참조하여 살펴보면 당시 모슬포 교회의 목사는 적극적인 반대의 성명을 내지 않고 있었다. 즉, 양영운과의 인터뷰 내용에서 마을 대표 우영진과 교회 대표 양영운이 주축이 되어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교회의 입장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다만 교인들 200여 명이 군사기지 반대 운동 회의에 참여하였을 뿐이었다. 다음은 양영운의 인터뷰 내용이다.
 
제가 참 교회가 굉장히 수 십 개 판으로 나누어져있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통일은 되도 교회통일은 안된다고 그러거든 인용인 즉슨 사실 이제 모갑경 목사 있을 때 그.. 사회.. 교회가 사회에 나가서 사회와 더불어 가지고 천국에 가는 길을 만들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선도, 미션이라고 하는 부분이 시간이 그 시스템적으로 교회가 체계를 갖추어지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왔던 선배들이나 모든 교회직부에 담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신앙을 받아내려고 하지도 않았어. 그래도 그나마 송악산 싸움을 할 때 같은 경우도 그런 사회문제에 교회도 참석해야 한다고 참석한 것도 사실상 교회가 큰 발전인데 그렇다고 교회가 자발적으로 지역사회문제에 있어가지고 문제를 찾아내고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그럴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있지 않아 그러다 보니깐 교회 개개인이 이렇게 좀 다 같이 어떤 사회단체 참석해가지고 어떤 신앙으로 어떤 그런 부분에 동참하면서 어떻게 하는 그것 외에는 교회가 집단적으로 이렇게 해본다는 것은 거의 없지
교회는 정말 이 사회가 정말 정의로우냐, 무엇이 잘못되어가고 있느냐 그믄 이걸 성경에 비추어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회가 이렇게 가야된다.’라고 방침을 방향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그리고 그렇지 않은 세력과의 투쟁도 해야 하고.. 또 그렇게 교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렇게 훈련도 시켜야하고.
 
위의 내용은 양영운 집사가 모슬포 군사기지 반대 운동과 더불어 수 십 년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느낀 점에 대한 것이다. 양영운은 교회의 역할이 사회적 봉사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향까지 제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모슬포 군사기지 설립반대 운동뿐 만아니라 적극적인 사회참여 운동 세력을 규합하여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교회의 성향과 앞으로의 방향성까지 바꾸지는 못하였다. 즉, 개신교는 이러한 소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확실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모슬포 지역 사회 안에서 융화되지 못하고 역사가 깊은 하나의 종교로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70-80년대의 상황은 두 가지 유형으로서 지역사회로의 토착화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급격한 공업화로 침체되고 있는 모슬포 사회의 경제적 자립을 일으키기 위한 노력, 소수의 적극적인 사회참여 세력들의 지역적 융화를 위한 노력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슬포 교회는 모두 성공시키는 데 실패하였으며, 다시금 토착화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만다.
 
3. 모슬포 교회의 지역 문화 활동 및 봉사활동에 따른 토착화(1990년대-현재)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결과 6・29선언이 발표되고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화된 사회로의 이행이 가능해졌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권위주의체제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변화를 맞이한다. 즉, 과거 자유를 외치던 사회 저항세력들의 움직임은 줄고 기본적인 생활의 영위와 삶의 질, 복지에 대한 관심이 증가 한다. 모슬포 교회 또한 이러한 사회 흐름에 따라 토착화를 위한 노력을 다른 방향으로 전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회복지이다.
여기서 사회복지란 일반적인 정부나 관, 민간에서 전개되는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닌 바로 종교적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다. 김희신(1994)에 따르면 개신교적 의미의 사회복지라는 것은 약자에 관한 관심과 긍휼사상, ‘예수’의 빈민구제사상, 병자 치유사상, 약자 보호사상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라 정의한다. 다음은 모슬포 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현재 사회복지의 내용이다.

<표 3>

 
모슬포 교회의 추진 사업 현황
복지시설
오름지역자활센터
보건복지부 지정 자활센터로 교회가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하모해수욕장의 마을회관 1층을 빌려서 지역아동센터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오름지역 자활센터는 저소득층 직업자활과 지역의 독거노인 간병, 목욕 봉사, 음식나눔 같은 봉사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지역아동센터
지역에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을 위한 방과 후 교육기관이다. 가정 생활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방과 후 운영하며 학습지도와 서예, 논술, 미술, 음악 같은 교육활동과 저녁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행복한가게
오름지역자활센터에서 운영하고 옷수선과 택배사업을 하며, 쓰던 옷과 신발, 생활용품들을 수거해서 판매하는 재활용 생활용품 가게이다.
봉사활동
대정읍 게이트볼 대회
2009년 6회째를 맞이하는 게이트볼대회는 지역의 어르신들의 건강과 화합을 위한 마을의 잔치로 열리고 있다. 해마다 20여 팀, 연 인원 300여명이 참여하고, 교회에서 점심식사와 푸짐한 경품을 준비하여 기쁨과 사랑을 나누고 있다.
김장나누기
해마다 겨울이면 지역의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김장김치를 나누고 있다.
이웃돕기
남신도회와 여신도회가 교인과 이웃을 위해 집수리와 도배, 청소를 하며 봉사하고 있다.
풍물 선교부의 운영
매번 복지기관을 돌며 순회공연을 통해 지역봉사에 이바지하고 있다.
장학금지원
초, 중등학교에 관해서는 신도와 비신도의 자제에 관계없이 매번 서초등학교, 대정중 등 학교에 직접적으로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며, 신도 가운데에서는 고3을 대상으로 우수 장학금을 지급하고, 신학을 전공하는 신도에게는 300만원의 거금을 장학금으로 지원하고 있다.

 

 
위와 같이 모슬포 교회는 다른 개신교 교회와 같이 여러 가지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03년 10월 1일 부터는 저소득층 학생을 대상으로 ‘방과 후 공부방’을 시작하였으며, 10월 5일 제직회에서는 교회가 월 20만원씩 간식비를 지원하였다. 그 후 2004년 4월, 삼성생명과 조선일보사로부터 내부 시설비를 보조받아 목양실, 주방, 식당을 리모델링하여 공부방으로 사용하다가 2004년 12월 19일 남제주군청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아 ‘수능 공부방’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2004년 말 자활후견기관과 수능공부방이 보건복지부와 남제주군청으로부터 위탁기관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2008년 말일자로 수능공부방이 폐지되고 지역아동센터로 전화하여 자활에서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1997년 9월 7일 모슬포교회는 게이트볼 팀을 조직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모슬포교회 장년들과 면류관회원들을 중심으로 게이트볼 모임이 활성화되었다. 모슬포 교회 당회장기 게이트볼 대정읍 행사로까지 이어져 2004년 6월12일 제1회 대회가 대정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모슬포 지역 사회의 화합과 친선 분위기 조성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음은 게이트볼 대회와 관련한 손재운 목사의 인터뷰 내용이다.
 
노인들이 쪼금 할 수 있는 것이 게이트볼이더라구요 쉽게. 그래서 그 대회를 시작한거에요, 올해가 7회 짼데 20여 개 팀 이상이 와서 200여명 가까이 이렇게 모여요. 이 대정읍에 속한 모든 게이트 볼 동회니깐 상당히 큰 행사죠? 상금도 드리고, 식사도 제공하고, 그래서 아주 성황리에.. (게이트볼 행사를 교회 자체에서만 주최하냐는 질문에) 아니 그런게 아니고 우리 교회에서만, 일반인들이 다 와서 하시는 거죠. 그러니깐 교회 물론 팀도 있긴 하지만, 다 마을 팀 들이예요. 신앙 예수를 믿어라 하거라 뭐 이런게 아니고, 그냥 놀이판만 만들어 놓는 거야 (대정읍 사람들이 모두 참가하고 큰 대회냐는 질문에) 네 굉장히 큰 대회죠.. 아마.. 이 대회만큼 큰 그런게 별로 많지 않을꺼에요
 
현재 게이트볼 대회는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으며, 대정읍의 여러 노인들이 팀을 만들어 ‘게이트볼’이라는 여가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었으며, 비신도와의 인터뷰에서도 다른 사회복지 활동에 대한 인지도는 없어도 게이트볼 대회에 대한 인지도는 높은 편이었으며, 이러한 문화생활의 제공은 ‘교회가 잘했다.’는 식의 반응이 나왔다. 다음은 앞으로 모슬포 교회가 추진하고자 하는 사회복지 활동의 내용이다.
 

<표 4>

 
순번
사업단명
사업내용
1
행복한식당
- 패밀리식당으로 운영(가족동반 할인제)
- 센터 정기적 식사, 간담회, 회식, 야유회 등 이용
- 가족기리 편안한 외식문화유도
(제품개발 : 생오리, 황토오리찜 등)
- 예약문화 정착 등
- 인큐베이터 수료생 영입, 시장형 사업단으로 추진
2
행복한 뷰티 건강샵
- 인큐베이터 수료생 영입, 시장형 사업단으로 추진
- 서귀포시 진출을 위한 교두보 마련
(중문동 샵 운영하며 사무실 개설)
3
행복한제주인
(다문화가족제주인 만들기 프로젝트)
- 결혼이민자(동남아결혼이주자) 제주인 만들기 사업
- 한글터득, 한국, 제주문화체험
- 결혼생활, 자녀양육 교육
- 행복한 가정 만들기 교육
- 자활근로 활동 후 취업유도
4
사회적기업신설
- 비영리단체 및 재단법인화
- 돌봄 영역 단일화하여 사회적 기업으로 추진
(장기, 가사, 돌봄, 산모 등)
- 사무실을 중문동에 설치
(서귀포시 중앙으로 진출하여 표선, 성산을 원활하게 관리)
- 인큐베이터 사업단 및 뷰티샵과 병행하여 추진

 

모슬포 교회는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 대처하는 방식으로서 적극적 사회복지 활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현재 토착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음은 손재운의 인터뷰 내용이다.
 
지역사람에게 다가가가는 교회, 지역사람들에게 필요한 교회. 교회로 와라 이런거 아니예요. 교회가 있어 든든하다. 교회가 있으니깐 좋다. 그런거.. 일반적인 입장에서 교회...지역사회에.. 함께 숨쉬고 함께 살아가는 그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좋은 그런 교회를 지향해요.
손재운은 인터뷰 내용에서 김희신(1994)의 연구와는 다른 측면으로 교회에서 추진하는 사업이 종교적 측면에서 지역사회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일부분인 교회가 지역사회와 융화되어 운영되는 것을 앞으로의 사회복지 활동의 방향으로 삼고자 하고 있다. 즉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인 지역아동센터의 운영, 장학금의 전달 등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기회제공이라는 측면에서 광선의숙과 비슷하나, 그 성격은 민족적이라기 보단 지역사회의 복리증진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2010년 추진하는 지역선교활동 중 행복한 제주인 만들기를 살펴보면 결혼이주민 여성에 대한 한글교육과 제주문화 체험, 자활근로 활동 후 취업 등은 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정책과 별개로 모슬포교회 측에서 실시한다는 점에서 지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역의 주요 현안에 따라 유용한 사회복지 활동을 계획하고 운영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비신도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점은 바로 지역 주민들의 무관심이다. 단순히 지역 주민들이 다른 종교라는 이유로 무관심 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회복지 활동이 게이트볼 대회를 제외하고 지역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극소수의 빈곤층이나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지역사회와 교회의 사회복지 활동 간의 연계성이 존재하지 않는 한 토착화의 가능성은 희박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Ⅲ. 결론
 
지금까지 모슬포 교회가 1909년 창립되고 현재 손재운 목사의 재임 시기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모슬포 교회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과 함께 토착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그 사건과 실천 속에서 해석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모슬포 교회가 100년 동안의 역사 속에서 그 지역사회와 소통하게 되는 계기와 기회는 분명히 존재하였으며, 그러한 형태는 모두 같은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본 장에서는 모슬포 교회가 지역사회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지역사회의 토착화를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첫째, 모슬포 교회는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지역사회와 끈끈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모슬포교회가 창립되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은 식민지의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 기존의 지배층 및 사회 모순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모슬포의 본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는 풍토가 확산되었으며, 이는 지역 사회 내부에서도 민족적 단결이나 지역 공동체 의식이 유지되었다는 것 보다는 개인의 삶의 안정만을 추구하는 의식이 서서히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의 발발은 이러한 모슬포 사회의 의식을 바꾸어 놓는 계기로 작용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이러한 사회의 의식의 전환을 일구어 낼 수 있었던 집단 중에서 하나가 바로 모슬포교회라는 사실이다. 모슬포교회의 독립군자금모금사건 등의 사건들을 통해 민족주의와 저항의 정신을 고취시키면서 교회와 모슬포사회 간 관계 형성의 하나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데 성공한다. 또한 4・3이라는 참혹한 사건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인명들을 구해냄으로써 ‘교회’라는 하나의 중심축으로 모슬포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각인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 이후 민족적 위기의 부재의 이유인지 모슬포교회의 지역사회에 대한 관계 형성 노력의 부재의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역사회와 모슬포교회 간의 끈끈했던 관계는 시간이 가면서 점점 와해되어 갔고, 현재 지역사회와 모슬포교회는 공생관계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는 존재들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사회의 가시적인 욕구를 해소해 주면서 관계 형성에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1910-20년대 아동 및 청소년이 교육받을 곳이 거의 없었던 모슬포 사회에 교육적 욕구를 해소해주기 위해 ‘광선의숙’이 모슬포 교회의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이는 교사의 대부분이 독립투사들로서 당시 필요로 했던 민족교육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으며, 배움의 욕구를 해소시켜주는 기관이었다. 당시 사회적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수용하였던 이유로 ‘광선의숙’의 성립 이후에 교세는 더욱 확대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그러나 ‘광선의숙’의 후신인 ‘광선고등공민학교’는 같은 의도로 추진되었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민족주의적 개신교의 학교는 더 이상 지역사회로 하여금 필요치 않은 것이었으며, 또한 공교육의 보편화로 인해 결국 폐교하고 말았던 것이다. 즉, 기존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민족주의 고취의 교육기관이 필수적이며, 지역적 요구가 수반되는 것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그러한 경향의 교육방침보다는 공교육 중심의 체계화된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지역적으로 교육에 대한 요구가 변화되고, 그러한 경향에 맞추지 못하게 되면서 지역사회와 멀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구호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존재하였으나 이 또한 모슬포 사회가 당시 경제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편이었으며, 주로 피난민을 위한 구호활동의 전개는 그들이 1953년 종전 후 육지부로 올라가면서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고 만다.
1982년의 신용협동조합은 당시 공업화, 도시화의 성장으로 인해 농촌의 경기가 침체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설립된 것이었으나 돈의 유통을 활발히 전개하여 경기를 활성화 하려는 측면보다는 저축에 의미를 둠으로써 결국 지역사회와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셋째,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지역사회와 관계를 형성하려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 모슬포 교회는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실시하고 지역사회와 관계 형성에 노력하고 있다. 즉, 사회적 요구에 맞추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지역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기보다 소수의 소외계층을 위한 활동으로서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와의 관계 형성은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눈에 띠는 점은 현재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는 ‘게이트볼 대회’이다. 이는 소수의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정 노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여가활동의 장을 마련한 것으로 이는 곧바로 모슬포 지역 내에서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으로 추진할 사회복지 활동 중 ‘행복한 제주인 만들기’는 ‘게이트볼 대회’에 이어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부나 관의 간섭을 받는 활동이 아니라 순수하게 지역사회에서 앞으로 요구되는 부분에 대해서 계획을 추진하는데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중시되고, 종교의 기능은 점차 쇠퇴해갔다. 종교에 의지하여 미래에 밝은 날을 간절히 기도해왔던 과거와는 달리 인간은 나날이 발전해 가는 과학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이며, 그 수단으로서 미래를 예측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고 그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수많은 종교 중 하나인 개신교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지속적인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면서도 사회 전체의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의 종교는 종교의 변화를 사회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종교가 따라가야 한다. 이 말이란 사회를 종교의 틀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닌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종교가 속하여 그 기능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를 무시하고 종교적 절대자로서 존재하고 군림하려는 모습보다는 그 변화를 수용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요구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소수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도 강화하는 한편 사회 구성원 전체와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조정민(사회교육 4), 김민권(사회교육 3), 김누리(사회교육 3), 이정민(사회교육 3)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